이향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
▽ 상사가 술자리에서 "야! 웃겨봐." 했을때 이상한 흉내를 낸다면... 냈다면... 나도 똑같다.
MBC의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시점>(아래 '전참시')이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장애인 비하' 논란 때문이다.
지난 7일 방송에 게스트로 신현준이 출연했고 그의 지난 영화 출연작들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지적 장애를 가진 마라토너가 주인공인 영화 <맨발의 기봉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다른 출연진들이 신현준에게 '영화의 주인공인 엄기봉씨의 흉내를 내달라'고 요청한 것.
이후 신현준이 지적 장애인 흉내를 내고 패널들이 이를 보며 웃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되었다. 심지어 패널로 출연한 양재웅 원장은 '신현준이 평소 다른 촬영 현장에서도 같은 흉내를 자주 낸다'고 언급했으며, 자막은 이를 '넘치는 개그 열망'이라고 표현했다. 지적 장애인을 웃음거리로 만들며 비하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다는 걸 드러낸 셈이다.
이 사건을 바라보며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가 있었다. 바로 영화 <말아톤>에서 발달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조승우다. 그는 지난 2005년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공개촬영이 있던 날 기자에게 화를 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유는 '자폐아처럼 포즈를 취해보라'는 한 기자의 주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조승우를 신현준과 비교하며 칭찬하기 위해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두 사람이 자신이 연기했던 인물을 흉내 내달라는 요구에 판이한 반응을 보인 것에는 예의를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릭쇼'가 만들어 낸 효과
그 차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잠시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책 <성의 정치 성의 권리>에 수록된 글 '괴물을 발명하라: 프릭, 퀴어, 트랜스젠더, 화학적 거세 그리고 의료규범'에서 루인은 과거 서구 사회에서 유행했던 '프릭쇼'(Freak Show)에 대해 기술한다.
'프릭쇼'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쇼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기형'이라 부르는 몸을 가진 이들을 전시했다. 그리고 당시 그 사람들은 대부분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장애'를 가진 이들이었다. 흥미롭게도 쇼에 등장하는 '프릭'(괴물, 돌연변이)들은 모두 '이방인'으로 지칭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당대인들의 평균 신장보다 작은 몸집 탓에 '소인국 사람'으로 불리던 하림과 바니 데이비스의 경우, 이들은 보르네오 원주민 출신으로 소개되었지만 실제로는 뉴저지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프릭쇼에 오른 모든 등장인물들은 신체적 차이를 제외하곤 관객들과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먼 타국, 그것도 서구가 미개인들이 사는 곳이라 여긴 지역의 출신들로 소개된 이유는 무엇일까.
프릭쇼는 소위 '비정상적'인 신체 전시를 통해 관객들에게 유흥을 제공함과 동시에 무엇이 '정상적'인 신체인가에 대한 규범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괴물의 존재는 곧 '누가 괴물이 아닌가'를 알 수 있게 만들어준다. 말하자면 프릭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충격과 호기심을 느낌과 동시에 무대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안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릭은 태생적으로 '우리(관객)'로부터 멀고 먼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렇건 아니건 간에.
그것은 '장애인 혐오'입니다
아마 눈치를 챘겠지만 이는 사회에서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과 똑같다. 오해와 다르게 혐오는 단순히 누군가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감정만 말하는 게 아니다. 혐오는 차이를 '옳고 그름',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로 전환하며 이를 통해 차별과 배제를 구성한다. 또한 누군가 '비정상'으로 지목될 때, 그와 대척점의 구도에 선 사람은 '정상'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성애 중심사회가 동성애를, 시스젠더인 사람이 트랜스젠더를 비정상으로 만드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마사 누스바움의 책 <혐오와 수치심>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군인들이 '여성스러운 것'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둔갑시킨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에겐 패배를 견딜 '강철 같은 남성성'이 필요했고 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비교할 대상이 필요했다고.
따라서 나는 이번 <전참시> '장애인 혐오' 논란의 밑바탕에는 장애인 혐오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신현준이 흉내 낸 그 모습은 사실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말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걸 보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웃는 사람과 대상 사이에 위계가 설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방송에서 언급된 신현준이 맡았던 다른 배역을 그가 재현했더라도 출연진들은 그렇게 재밌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그토록 편하게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현준이 흉내 낸 지적 장애인을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존재로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만큼 패널들은 그 장애인과 대비되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된다. 프릭쇼는 윤리적인 이유로 결국 금기되었지만 프릭을 만드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단어에서도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벙어리장갑'. 근래들어 '손모아장갑'으로 부르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차이가 혐오로 전환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나는 신현준을 비롯한 패널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다못해 악역일지라도 자기가 연기한 캐릭터를 멸시하는 배우는 찾기 어렵다. 특히나 신현준이 연기했던 엄기봉씨는 실존 인물이다. 그에게 '엄기봉'이라는 캐릭터는 더욱 각별한 존재였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신현준은 조롱과 비하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보다는 아마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혐오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와 달리 쉽게 확인하기 어려우며 일상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마 신현준도 당시 자기가 한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행위의 의미까지 달라지게 만들진 않는다.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배우 조승우는 <말아톤> 개봉 이후 '자폐아 연기는 어떻게 하셨나요? 힘들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운동복 입고 뛰느라 겨울에 땀 빼는 게 힘들었어요."
나는 조승우의 대답이 발달장애인을 연기하는 게 다른 캐릭터보다 더 힘들 것도, 더 쉬울 것도 없었다는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장애든 시대든 직업이든, 결국 배우는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연기로 표현해야 한다. '특별히 장애인이 더 어렵다'는 말은 결국 장애인이 우리와 간극이 큰 존재, 단지 다른 몸이나 인지방식을 가진 것을 넘어서 존재 자체가 우리와 다른 인간임을 전제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이는 차이가 차별로 구성되고 다름이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혐오로 미끄러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나는 조승우가 그 지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에게 발달장애인인 자신의 캐릭터는 이상할 것도 웃길 것도 없는 그저 자신과 다른 하나의 개인일 뿐이었다. 누군가의 차이를 보고 웃음거리로 삼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이 기억해야 할 지점이다.
출처 : https://v.kakao.com/v/20180711141608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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