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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NG/태도

세상이 빠른 걸까, 내가 느린 걸까?

by Captain Jack 2018. 1. 21.

세상이 빠른 걸까, 내가 느린 걸까?



▽ 독수리 타자를 치시는 부장님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다가 한 번은 

     나도 나중에 내 밑에 사람이 나를 보며 한숨을 쉬는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침대에서 냉장고까지 열 발짝 걸어가는 게 귀찮아서 끼니를 거르기 일쑤인 나에게, 경기도 끝자락에 위치한 고향 집은 이역만리나 다름없다. "서울에서 버스 타고 한 시간이면 오는데 멀기는 뭐가 멀다는 거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구먼." 동네 아줌마들과 고속버스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봄이면 벚꽃 구경, 여름이면 바다 구경, 가을이면 단풍 구경, 겨울이면 눈 구경하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는 나의 어머니는, 꼼짝없이 누워만 지내는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단다. 좀처럼 얼굴을 봬주지 않는 딸내미를 야속하게 여기는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불효가 특기인 나는 부모님 생신이나 명절처럼 특별한 날이 되어야지만 집에 내려갈 생각이 겨우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도 홀로 가는 법 없이 언니 부부를 대동한다. 형부 차를 얻어 타고 편히 귀성하려는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이번 신정에도 형부 덕을 보려고 했으나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고속버스 터미널에 갔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헤치며 넓디넓은 터미널을 헤맨 끝에 매표소에 다다랐다.


"평택 한 장 주세요." 유리창 너머 판매원에게 행선지를 말하자 쥐구멍 같은 창구로 승차권이 미끄러지듯 밀려나왔다. 가로로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 가운데 즈음에 세로로 점선이 그어져 있었다. 회수용과 승객용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것이 쪽 갈라지기라도 할세라 엄지와 검지만으로 차표를 살포시 잡고서 찬바람 쌩쌩 부는 텅 빈 승강장에 섰다. 내가 몸을 부르르 떨 때마다 승차권도 파르르 함께 떨렸다. 차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 뒤로 따라붙었다.


예정된 시간에 꼭 맞추어 버스가 도착했다. 취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뿜으며 스르르 문이 열렸다. 고향 앞으로! 나는 일등으로 버스에 올라 기사님께 승차권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기사님은 내 표를 받아줄 생각 따위 전혀 없다는 듯,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계셨다. 뭐야? 왜 이래? 검표하면서 회수용은 당신이 가지고 승객용은 나한테 돌려주는 거 아닌가? 머쓱해진 나는 "저기…이거…" 하며 기사님 쪽으로 승차권을 조금 더 들이밀었다. 그러자 기사님은 나를 흘끔 쳐다보며 쌀쌀맞게 대답하셨다. "대세요." 순간, 나는 미궁에 빠져들었다. 대라니? 이걸? 얻다? 혹시 카드 단말기에 승차권을 대라는 건가? 아니 근데 이런 종이 나부랭이가 단말기에 인식이 될 리가 없잖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뭐가 바뀌기라도 한 거야? 갖다 댔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쪽팔려서 어떡하지? 짧은 순간에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사람들이 들을 성싶어 기사님께 속삭이듯 여쭈었다. "이걸 어디에다가 대는 거예요?" 기사님은 성가셔 죽겠다는 목소리로 "다른 승객들처럼 저기에다가 대시라고요" 하며 턱 끝을 까딱하셨다. 기사님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휴대폰 화면을 단말기에 대며 버스에 줄줄이 탑승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만 빼고 모두가 모바일 승차권을 구매한 모양이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날아온 원시인처럼 당혹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저기 저는 모바일 승차권이 아니라 종이 승…" 기사님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왈칵 짜증을 내며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씀하셨다. "종이 승차권에, 큐알코드 있으니까, 그걸, 저기에다가, 갖다 대시라고요.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버스 처음 타요?" 그제야 자세히 들여다본 승차권 한구석에는 미로처럼 생긴 자그마한 큐알코드가 새겨져 있었다. 쭈뼛쭈뼛, 승차권을 단말기에 가져다 대자 '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


이미 제 좌석을 찾아 앉은 승객들은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한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두 뺨이 후끈 달아올랐다. 좁다란 통로를 황급히 걸어 내 자리에 도착하자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까짓 거 모를 수도 있지. 왜 이렇게 사람 무안을 주고 난리래? 처음부터 친절하게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대세요, 하면 뭘 어디다 대라는 줄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그리고 말이야. 표를 가져가지도 않을 거면서 회수용이랑 승객용은 왜 나눠놓는 건데? 어디 한번 헷갈려 보라는 거야 뭐야? 웃겨, 진짜!' 나는 집에 가는 동안 보려고 챙겨왔던 책은 가방 속에서 꺼낼 생각도 않고, 기사님의 얄미운 뒤통수만 실컷 노려보며 한 시간을 구시렁구시렁 중얼거렸다.


험난한 여정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얘, 옷 갈아입어야지!" 엄마는 서랍을 뒤져 옷가지를 찾았다. 나는 그런 엄마의 등 뒤에다 버스에서 있었던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러자 엄마는 황당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여태 그걸 몰랐어? 에이그, 아줌니! 누워만 계시지 마시고 여기저기 좀 돌아다니고 그러셔요. 그래야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아시쥬. 말 나온 김에 버스표나 끊어놔야겠다. 이모랑 눈꽃축제 가기로 했어." 엄마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승차권을 예매했다. 나는 화석처럼 가만히 누워 그런 엄마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세상이 빠른 걸까, 내가 느린 걸까? 아마 둘 다겠지. 아이고, 따라가기 숨차다, 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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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v.kakao.com/v/20180119040038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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