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乙의 역사
▽ 역시 가장 좋은 교과서는 역사책이다.
▽ 기술자들이 기술들고 외국가는게 우리한테 어마어마한 피해인데 그걸모르고 취급을 그따위로 하고 있으니...
1503년 함경도 단천, 조선의 두 과학자가 관가를 찾아왔다.
한명은 양인이고 또 다른 한명은 장예원 소속 종이었는데, 양인의 이름은 김감불이었고, 종의 이름은 김검동이라 했다.
(감불의 원래 이름은 까불이고, 검동의 원래 이름은 검둥이였을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상당히 그럴 듯 하다.)
이들은 말했다.
“납 한근으로 은 두돈을 불릴 수 있사옵니다.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매운재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이면 짜자잔, 은이 나온답니다.”
그들은 은과 납의 녹는점과 끓는점, 비중의 분리를 이용하여 은 생산 수율을 높이는 기술을 선보였다.
조선에 대한 우리의 편견으로는 관가에서
“우리 조선은 공돌이 취급 안해요”
라며 쫓아내는 장면이 나오고 후대에 사는 우리가 '역시 헬조선 클라스 ㄷㄷㄷ' 이라 혀를 차는게 익숙할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도 부국강병 좋아한다 이거야"
관청 사람들은 이들의 실험이 '이거 나만 알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중요한 실험이다' 라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다. 따라서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조정 신료들은 두 과학자에게 왕 앞에서 직접 시연을 보이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무려 연산군. 이쯤되면 뭔가 연산군이 갑자기 빡이 돌아 '저 놈들을 당장 찢어 죽여라' 라고 할 것만 같은데, 놀랍게도 연산군은 실험을 흥미 있게 구경한 뒤, 그들을 고이 돌려 보냈다.
그렇다고 이를 실용화 하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연산군은 마치 사람들이 노동 보다는 연애를 좋아하듯 은 생산 증대 보다는 흥청에서 노는 것에 관심을 더 많이 가졌지 않을까 한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단천에서 개발한 연은분리법은 이후 조정의 주 관심사항은 아니었다.
군왕을 끌어 내리고 새로운 왕을 옹립했던 만큼, 중종대의 대신들은 정책이나 민생 문제에 있어 연산군이 싸지른 응가를 치우느라 매우 바빴다. 아울러 본인들의 세력을 열심히 심어 놓는데도 열을 올려야 했기 때문에 연은분리법까지 신경 쓰기는 매우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은의 생산을 늘린다 해도 문제가 있었다.
신기술을 도입하여 은을 많이 생산한다 해도, 명에서
‘ 어? 니네 은 같은것 잘 안나온다 하더니, 이젠 좀 많이 나오네? 좋아, 이제부터 조선은 우리한테 은도 조공하삼’
이라며 뜯어갈까 걱정했다.
조선보고 쫄보라 욕하면 안된다. 그들의 우려는 매우 합리적이었다. 지금도 대기업 하청업체가 혁신을 통해 원가를 절감해서 수익을 내면, 원청업체들은 하청업체에게 단가 인하 압력을 넣는다.
즉 하청업체들이 혁신을 통해 비용을 절감해 봤자, 이익 보는게 없다. 애국심이나 인류애가 있으면 모를까, 혁신을 벌여야 할 이유가 크지 않다. (원청업체들의 하청업체들을 쥐어 짜서, 어쩔 수 없이 혁신하게 만들 수는 있다.)
(단가인하 압력이 아닙니다. 문자를 보냈는데, 우연히 협력업체 담당자에게 들어갔을 뿐입니다.)
15세기 조선의 주변국 중에서 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조선과 명의 관계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조선은 오히려 명이 조선이 신기술을 알아냈다는 소식을 알게 될까, 조선 땅에서도 은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노심초사하여 은광개발을 적극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명과 한걸음 떨어져 있는 일본은 조선과 상황이 달랐다. 일본은 조선 중종대 경수와 종단이라는 조선 기술자들을 통해 단천연은법의 기술을 처음 전수 받았다, 이후에도 유서종을 비롯하여 여러 루트로 조선의 연은분리 기술을 도입하였는데, 원청업체로부터의 압박에 자유로웠던지라, 마음 놓고 신기술을 이와미 광산 채굴에 도입할 수 있었다.
이와미 광산에서 채굴된 광석에 연은분리법이 사용되자, 일본 내 은의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와미 광산 개발 이후, 일본의 은 생산량이 전 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차지했을 정도였다. 당시 일본과 교역을 했던 유일한 유럽 국가 포르투갈은 일본을 은의 섬이라 불렀다.
한편 1581년 명나라 재상 장거정은 세원을 넓게, 그러면서 단순하게 개편하여 세수를 확충하고자 일조편법이라는 이름으로 조세 제도를 개편한다.
일조편법은 복잡하게 여러 종류로 나눠 있던 조세를 땅에 대한 세금과, 사람에 대한 세금, 두 가지로 단순화시켜 세금 탈루를 막아 세수를 늘리고자 하는 의도로 입안된 정책이다.
일조편법이 종전 조세체계와 다른 것은 쌀이나 특산물 같은 현물이 아니라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만든 점이다. 중국은 당나라 시절부터 이미 민간 경제가 상당히 활발해져서, 명대에는이미 시장에서 은이 거래의 수단으로 널리 쓰였는데, 정부에서 이를 세금 납부 수단으로 지정하면서, 이제 명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반드시 은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따라서 명나라는 민간경제내에서의 수요와 조세납부를 위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더 많은 양의 은을 필요로 했다. 마침 중국에는 해외에서 충분한 양의 은이 흘러 들어왔다.
도자기나 견직물 같이 중국산 제품에 대한 해외 수요도 넘쳐 났고, 중국 경제내에서 금대 은 교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보니 (즉 중국에서 은의 상대 가격이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은의 양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산 은도 중국으로 유입되는 은의 중요한 축이었다. 명나라는 비단과 차 같이 일본의 영주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좋아할만한 물건들이 많아 교역을 통해 일본의 은을 취득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아울러 일본과 직교역이 아니더라도 조선을 통할 수도 있었으니, 일본인들이 조선의 인삼을 사면서 은을 제불하면, 조선은 그 은을 가지고 명의 물건을 사는 식으로 교역이 벌어졌다.
이들외에도 다양한 지역 출신 상인들이 중국 남부에서 활동하였고, 멀리서는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상인들 같은 중개상들도 있어 교역 기회도 충분히 많았다.
16세기 후반 명나라에 들어오는 은의 절반 가량은 일본에서 생산된 은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경제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흠좀무.
명나라에 은의 유입이 늘면서 물가가 오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유럽에서 그랬던 것만큼 인플레이션을 크게 겪었다 할정도는 아니었다.
명나라의 경우는 당시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화폐 공급을 받아줄 수요가 탄탄히 존재하여, 은의 유입이 물가를 끌어롤리기 보다는, 기존에 현물로 주고 받던 거래를 화폐로 주고 받는 거래로 바꾸는 효과가 상당했기 때문에, 은의 유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유럽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었다.
은 생산 증대는 일본의 구매력을 높여주었다. 영주들은 각종 사치품을 사들이면서, 아울러 포루투갈 상인들로부터 발달된 유럽제 무기도 구매했다. 무기와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일본의 영주들은 세력 확충을 위한 각축을 벌인다. 그리고 내전에서 승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진출을 위해 조선을 침공했다.
"어이 헬조선, 아시아의 영광을 위해 우리한테 정복당해주지 그랬음?"
대륙의 패자가 되겠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대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승승장구하며, 조선의 국왕 선조를 한반도 북쪽 끝까지 몰아붙였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해군의 반격에 해상보급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면서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어 조선 육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섰고, 위기의식을 느낀 명나라가 지원 병력을 보내줌으로써 (파업중이던 황제가 신속하게 병력을 파견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신하들을 놀라게 했다.) 일본은 조선땅에서 쫓겨 난 채 자기네 섬에서 다시금 패권을 두고 내전에 돌입한다.
"응 다음 뇌내망상 환자"
조선에서 도입한 연은분리 기술을 이용하여 은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높인 일본은 그로 인해 얻은 무기와 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조선 침공에 나섰으나 패했다.
조선과 일본의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은 다시금 내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내전에서 승리를 하면서 일본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을 끝장내고 권력을 차지한 도쿠가와 정권은 화약 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대외 교역을 제한했다. 다시 예전의 고립 정책으로 돌아간 것이다.
조선은 7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가 피폐해졌다. 전쟁 과정에서 보여준 지도층의 무능은 나라의 질서와 기틀을 뒤흔들었고, 이어 벌어진 청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힘도 못쓰고 패배하는 원인이 된다. 아울러 외적에게 관광당한 기억은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보수적이고 교조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명나라 왕조에도 암운을 드리웠다. 물론 임진왜란의 참전으로 인한 재정 소모가 당장 마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끝난 이후인 1610년대 명의 민간 경제는 호황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호황이 끝나고 1630년대부터 시작된 기후 변화 악재가 겹치면서 농업 생산이 크게 감소하자, 전대에 누적된 재정 부담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북방에서 만주족의 위협이 증가하여 재정 지출 수요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데 농업 생산은 감소하여 세수는 충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이미 그 동안 쌓아놓은 부를 써버려 곳간도 넉넉치 않았다. 명은 재정 압박을 세금을 올려 해결하려 했고, 조세 부담이 커진 농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며 왕조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사실 북방으로부터 위협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었죠. 거의 백년전부터 북로남왜라 해서 생고생을 ㅠㅠㅠ"
민중의 분노는 나라 전역에서 봉기로 이어졌다. 명색이 제국인지라 봉기 대부분을 진압했지만, 북동쪽에서 밀려오는 청의 위협에도 신경써야 했던 만큼, 봉기 세력들에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했다.
반란의 불은 껐지만 작은 불씨들이 곳곳에 남았다. 그리고 그 불씨가 결국 명의 숨통을 끊게 되니, 이자성의 난은 276년간 지속된 제국의 명운을 끝장냈다.
한편 은의 유입 감소로 세수가 충분하지 않자, 명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은 생산 감소 때문에 명나라의 은본위 경제가 큰 타격을 입고, 결국 이자성의 난에 왕조가 무너졌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청 왕조 때까지 중국으로 가는 은의 양은 크게 줄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일본산 은의 유입이 줄었지만, 유럽과 아메리카로부터 여전히 많은 양의 은이 유입되었다. 아메리카에서 오는 은은 태평양을 타고 마닐라를 거쳐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마닐라는 일본의 쇄국과 명 왕조의 몰락으로 잠시 쇠퇴기를 맞았지만, 이내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를 잇는 교역이 살아나면서 19세기초까지 활력을 유지했다.
17세기 동아시아 나라들은 쇄국의 길을 걸었지만, 세계화의 물결은 그들의 코 앞까지 밀려 들어와 있었다.
조선의 두 과학자가 만들어 낸 신기술은 명의 착취가 걱정되었던 조선에서 발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그 빛을 발했다.
일본은 은 생산 급증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한층 키웠고, 무기도 도입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여러분 원청업체의 갑질이 이렇게나 나쁜 것입니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armada1588/221213858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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