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LLECTING/LOL

[LOL 단편소설] 트페&그브 - 불타는 파도

by Captain Jack 2018. 12. 3.

  

[LOL 단편소설]

      

   

트위스트 페이트 & 그레이브즈

  

  

     

  

불타는 파도

   

    


  


학살의 부두 | 의뢰 | 오래된 친구

1막 1장


쥐들이 찍찍거리는 소리에 귀가 멍해질 지경이었다. 쥐 떼 소굴 끝에 자리한 학살의 부두는 그 이름처럼 악취가 진동했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썩은 바다뱀 고기의 비린내를 맡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겹겹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깊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중무장한 톱니 갈고리단이 활개 치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횃불처럼 어른거렸다.


그들은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다. 정면승부로는 이길 수 없으리라. 더군다나 나는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법을 모른다. 덧붙여 오늘은 싸울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지저분한 동네까지 행차했냐고?


돈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번 건은 위험한 도박이지만 포기하기에는 보수가 너무 짭짤했다.

게다가 사전 조사를 통해 알맞은 카드 패도 준비해 왔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갔다 나올 생각이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돈을 챙겨 동트기 전 이곳을 뜰 것이다. 잘만하면 이 망할 물건이 없어진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 난 그사이 발로란으로 떠날 수 있을 거다.


저벅저벅, 텅 빈 골목에 발소리가 유령처럼 울려 퍼졌다. 경비를 서던 놈들이 도살장 뒤로 사라졌다. 건물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돌아올 때까지, 주어진 시간은 이 분. 시간은 충분하다.


마침 은빛으로 빛나던 달이 구름에 휩싸였고 선착장은 어둠에 물들어 파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부들이 버리고 간 나무 상자가 부두에 널려 있었다. 악취가 좀 나겠지만 오늘 같은 밤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중앙 창고의 옥상에 석궁을 든 그림자가 일렁였다. 다른 경비들이다. 그림자는 모였다 흩어지며 이지러졌다. 말소리와 희미하게 깔깔거리는 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수다를 떠는 꼴을 보아하니 목에 방울을 달고 왔어도 몰랐을 터다.


아마 여기에 올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은 없다고 안심했겠지.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자 소금기를 빼느라 매달아 둔 거대한 작살이 서로 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잡음을 냈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마저도 음산한 곳이었다. 괜히 섬뜩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했다.


축축한 돌길 여기저기 녹슨 쇠사슬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 거대한 기중기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힘으로는 들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바다 괴물을 도살장으로 옮길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도살장 쪽에서 구역질 나는 악취가 풍겨왔다. 머리가 띵해질 만큼 지독한 냄새였다. 한번 그 냄새 곁을 지나면 몸속까지 밸 것 같은 그런 냄새. 이거 참, 보수에 옷값도 같이 청구해야 할 판이다.


희미한 불빛이 학살의 부두에 정박하고 있는 여러 척의 배에서 흘러나왔다. 밑밥이 음울하게 수면 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때 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범선의 시커먼 돛이 위풍당당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빌지워터 사람이라면 그 배를 모를 수 없다.


입꼬리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나는 지금 이 섬을 지배하는 자의 창고를 털러 간다. 이건 생사가 달린 도박이다. 긴장감에 온몸의 털이 곧추섰다.


창고는 예상대로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입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출입구마다 자물쇠와 걸쇠가 걸려 있고 경비가 지키고 있다. 침입한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이다. 물론 나는 예외지만.


창고 맞은편의 후미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젠장. 막다른 길이다. 게다가 생각했던 것만큼 어둡지 않아 경비들이 온다면 들켜버릴 게 뻔했다. 

잡히기라도 하면……빨리 죽여주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자에게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오래 고통받다 천천히 죽음에 이르리라.


물론 방법은 있다. 잡히지 않는 것.


그때 묵직한 발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가까워졌다. 경비들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다. 도망칠 시간은 길어야 몇 초뿐이다. 

다급히 소매에서 카드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기까지는 쉽다. 까다로운 건 지금부터다.


카드의 은은한 빛이 마음에 닿아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온 사방을 울릴 듯 두근거렸고 부담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현기증이 나 반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려 애를 썼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가야만 하는 곳을 온 힘을 다해 떠올렸다.


하…… 어느새 나는 창고 안에 와 있었다. 언제나처럼 속이 메슥거렸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완벽하게.


난 정말 끝내준다니까.


경비 중 한 놈이 골목길을 훑어보다 바닥에서 카드를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잠깐 몸을 풀며 주변을 둘러봤다. 바깥의 등불이 흐릿하게 흘러들어와 실금이 간 벽이 거미줄처럼 보였다.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렸다. 

깊은 물에 잠긴 것처럼 사물들의 경계가 뿌옇게 흔들리고 있었다.


창고는 열두 개의 바다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로 터질 듯 채워져 있었다. 매끈한 철제 갑옷, 이국적인 신비를 자아내는 예술품, 은은하게 빛나는 비단까지 값비싼 물건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 목적은 이런 시시한 것이 아니다.


최근 도착한 물건이라면 짐이 드나드는 중앙 출입구 근처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종이, 나무, 금속…… 다양한 재질의 상자들을 조심스레 더듬던 손이 자그마한 나무 상자 위에서 멈췄다. 이거다.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 색의 비단 받침에 단검이 놓여 있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아름다운 단검이었다. 손을 내밀어 만지려는 순간.


철컹.


저 익숙한 소리. 그 소리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내 뒤에 서 있는 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 그레이브즈였다. “오랜만이군.”

  

  


기다림 | 재회 | 불장난

1막 2장

 

얼마나 어둠 속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나방이 등불로 돌진해 타닥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침침한 허공을 쏘아보며 가만히 서 있자니 마음이 소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노가 나를 지탱해주었다. 복수하기 전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자정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뱀 같은 자식. 물론 카드 마술을 부려 창고 한복판에 나타났다. 딸각. 

곧바로 산탄총을 장전했다. 기필코 날려버릴 테다. 이 더러운 배신자를 몇 년이나 찾아 헤맸던가. 이제야 운명의 총구를 겨눌 시간이 온 것이다.


“트위스티드 페이트.” 그를 불러 세웠다. “오랜만이군.”


오늘을 기다리며 속으로 되뇌었던 수많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를 보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반면 이 자식의 텅 빈 두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두려움도, 후회도, 놀란 기색조차도. 단단히 장전된 총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데. 망할 놈.


“도대체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던 거야?” 싱글싱글 웃는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얼굴을 보자 분노가 치솟았다.


놈을 향해 총구를 들이댔다. 당장 방아쇠를 당긴다면 모든 게 끝장날 터였다.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변명이라도 듣고 싶다. “왜 그런 거지?” 어차피 교묘한 거짓말이나 늘어놓을 게 뻔하다. 그래도 묻고 싶었다.


“총은 치우자. 응? 우리 친구잖아.”


친구? 친구라고? 이놈이 나를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나는 순간 이 야비한 자식을 내 눈앞에서 영원히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가만히 지켜봤다.


“이렇게 단정하게 차려입은 건 처음 보는데?”


그 말에 모습을 유리에 비춰봤다. 쥐가오리에게 무자비하게 물어 뜯겨 꼴이 말이 아니었다. 

경비의 눈을 피해 바다로 수영해 들어오느라 이리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단정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였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약간의 여유가 생긴 다음부터 말쑥한 차림만 고집해왔다. 곧 엉망진창으로 망가질 테지만. 그전에 대답을 듣고 말겠다.


“그 계집애 같은 얼굴을 벽에 뭉개버리기 전에 왜 내 뒤통수를 쳤던 건지 말해.”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상대할 때는 정면으로 세게 나가야 한다. 

이 미꾸라지 같은 놈이 언제 교묘하게 빠져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같이 일할 때는 그 간교함 덕을 봤지만 이젠 아니다.


“사람이 수용소에서 십 년을 썩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아냐고!”


알 리가 없다. 놈은 침묵을 지켰다. 나에게 저지른 잘못을 안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보통사람이었으면 미쳐버리고 남았어. 네놈에게 복수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틴 거다.”


그러자 놈이 간사한 혓바닥을 놀렸다. “내 덕분에 버틴 거네. 그럼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반달처럼 휘어진 눈가에 실소가 어려 있었다.


툭.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분노에 눈이 먼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분명 살살 약을 올려 분별력을 잃게 하고 그 틈을 타 슬쩍 사라지려는 수작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놈이 놀란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나는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날 얼마에 팔아넘긴 거냐?” 창고 안으로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시간을 벌어보려는 수작인지 놈은 계속 미소만 짓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발소리가 가까이서 창고를 울렸다.


“말콤. 얘기하기 싫은 건 아닌데, 다른 적당한 때가 있지 않을까?” .


그 순간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카드가 나풀거리며 춤을 췄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조각조각 찢긴 카드가 허공에서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저 망할 손도 날려버릴 수 있었는데.


“정신 나갔어?” 길길이 날뛰며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말했다. 드디어 놈이 평정심을 잃은 것이다.

“동네 사람들 다 깨우려고 작정했냐? 창고 주인이 누군지 알기나 해?”


글쎄. 관심 없는데.


다시 총을 조준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카드들이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펑펑 터졌다. 

나는 카드에 응수하며 쉴 새 없이 총을 쏘았다. 하지만 녀석을 정말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싶은 건지, 반만 죽여 놓고 더 따져 묻고 싶은 건지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자욱한 총탄 연기와 널브러진 나무 상자 파편 사이로 창고의 문이 덜컥 열렸다.


열 명이 넘는 해적단 무리였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엎질러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너 진짜 이럴 거야?”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손에 다시 카드가 들려 있었다.


나는 총을 똑바로 겨눈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끝장을 볼 시간이 왔다.

  

  


와일드 카드 | 경고 | 현란한 손놀림

1막 3장

  

고요하던 어둠이 세찬 파도처럼 술렁이기 시작했다. 상황은 빠르게 최악으로 치달았다.


창고 안은 어느새 톱니 갈고리단으로 우글거렸다. 그레이브즈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무너뜨리는 것만이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총탄이 날아올 것 같은 불길함에 사로잡혀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무시무시한 총소리가 들려왔고 내 앞에 있던 상자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정말로 작정하고 왔구나.


맘모스의 상아가 무더기로 쌓인 곳을 공중제비로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레이브즈를 향해 카드 세 장을 날리고는 카드가 제대로 맞았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상자 뒤로 몸을 숨겼다.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 잠깐은 카드로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몇 초만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텐데.


나를 찾아 헤매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는 그레이브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친 성미 하며 황소고집은 여전하구만. 이 자식은 도무지 포기를 모른다.


그레이브즈가 으르렁거렸다. “이번엔 내빼지 못할 거다. 절대로.”


아, 저 고집불통.


하지만 그레이브즈, 넌 틀렸어. 난 이번에도 도망칠 거니까. 그가 꼭지가 돌아 달려들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대화로 풀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그때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데마시아산 고급 갑옷에 맞고 튕겨 나간 총알이 사방에 쏟아지듯 꽂히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창고를 뒤흔들었다. 간신히 총탄을 피하며 집히는 대로 카드를 날렸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갈고리단 놈들까지 상대해야 했다. 

그레이브즈는 저주가 뒤섞인 협박을 뇌까리며 방아쇠를 당겨댔다. 잊어버릴 뻔했어. 덩치에 비해 참 날쌔다니까.


하지만 더 시급한 문제는 멍청한 자식 덕분에 톱니 갈고리단이 벌떼처럼 몰려든 거다. 우리는 완전히 포위됐고 중앙 출입구도 봉쇄됐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해. 그러나 의뢰를 완수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창고를 거의 한 바퀴 돌았는데도 그레이브즈는 성난 황소마냥 씩씩거리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창고는 이미 갈고리단 놈들이 점령해버렸지만 다른 놈들이 더 오고 있을 게 뻔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붉은빛을 뿜는 카드를 꺼내 중앙 출입구에 던졌다. 그러자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바닷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고 문가에서 쥐 떼가 찍찍거리며 황급히 흩어졌다. 

갈고리단 놈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갈고리단 놈 하나가 손도끼를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놈의 무릎을 가볍게 걷어차고 다시 카드를 날려 다른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놈들의 눈을 피해 부리나케 내달려 단검을 낚아챘다. 이 아수라장을 겪어내느라 갑절로 고생했으니 돈이라도 챙겨야겠다.


코앞에 출입문이 열려있는데도 갈고리단 놈들 때문에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짠내가 섞인 악취가 훅 끼쳐왔다. 

숨을 고르며 아직 소란이 미치지 않은 창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어둑한 상자들 틈으로 몸을 숨기고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창고 안은 난장판이 되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손안의 카드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집중하려 호흡을 가다듬을라치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그레이브즈가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그의 총, 운명이 요동치며 사방을 헤집을 때마다 갈고리단 놈들이 바람 앞의 낙엽처럼 쓰러져나갔다. 

부서진 상자의 잔해, 끙끙 앓으며 바닥에 뒹구는 해적 놈들, 쏟아져 나온 보물까지. 이것 참 덕분에 골치 아파졌다.


내 손안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레이브즈가 이 카드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증기 기관차마냥 연기를 뿜어대던 운명의 총구가 나를 향했다. 집중할 수 없다. 우선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거냐!” 천둥 같은 고함 소리가 창고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틈을 주지 않고 나를 쫓았다. 대체 언제 저렇게 영리해진 거람.


집중력은 점점 흐트러져갔다. 이대로 가다간 갈고리단 놈들에게 붙잡힐지도 모른다. 

많은 놈들이 쓰러졌는데도 숫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끝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옷은 악취도 모자라 이젠 흠뻑 젖어버렸다. 자비를 모르는 놈들의 두목을 생각하니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도무지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덫에 걸린 게 분명해. 갑자기 말도 안 되게 쉬운 의뢰가 들어와서 가 보니 옛 동료가 기다리고 있다니…… 누군지 몰라도 그레이브즈보다 훨씬 똑똑한 놈이 꾸민 일이 틀림없다.


그렇다. 방심했던 거다. 내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지만 이미 나를 둘러싼 어깨들에게 한 대씩만 맞아도 충분할 것 같았다.


일단은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그때였다. 두 발 연속으로 산탄이 날아왔다. 엎어진 유리잔처럼 몸이 크게 휘청이며 뒤로 넘어갔다. 

위험해. 

나무 상자에서 백 년은 더 묵은 듯한 먼지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살이 날아와 썩은 나무판자에 박혔다. 한 뼘만 아래로 꽂혔다면 이마가 박살 났을지도 모른다.


“그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그레이브즈의 녹슨 칼날같이 쉰 목소리가 들렸다. 불 속에 있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음에도 얼음을 쥔 듯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어쩌면 이 자식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아까의 폭발에서 불꽃이 튀어 천장이 무서운 기세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창고는 얼마 안 가 무너질 터였다. 부두에서 봤던 검은 깃발이 마음속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부르짖으며 그레이브즈에게 호소했다. “우리 모두 사기당한 거라고!”


“사기 전문가가 보기에는 그런가 보지?” 빈정대는 투였다.


그래도 설득해야만 했다. 창고 안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연기로 가득 찼다.


“일단은 같이 빠져나가자. 복수는 그다음에 생각해. 제발.”


나는 콜록거리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레이브즈는 이를 갈았다. “네놈을 믿느니 성을 갈겠다.”


그래. 방법은 이것뿐이다.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것. 설득하려 하면 할수록 길길이 날뛸 터였다. 

그레이브즈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 틈을 탔다. 간신히 몸을 판자 뒤에 숨겼다. 카드에 정신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창고 밖으로 이동한 순간, 심해에서부터 숨을 참고 수면에 다다른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용암 같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카드 한 장만 남겨진 빈자리에 서서 잔뜩 약이 올라 헛된 총질이나 하고 있겠지.


활짝 열린 문을 유유히 빠져나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드 뭉텅이를 집어 던졌다. 손장난이나 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창고는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구름마저 붉게 물들어 하늘이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레이브즈를 남겨두고 온 게 살짝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그 정도에 무너질 위인이 아니니 문제없다. 

강한 놈이니까…… 게다가 부두에 불이 나면 빌지워터 전체가 발칵 뒤집힐 테니 도망치기엔 그편이 좋겠지.


하지만 어떤 길로 도망치면 좋을지 고민하던 내 등 뒤로 귀를 찢는 듯한 폭발음이 울렸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무너진 창고 벽 사이로 그레이브즈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산탄총을 난사하며 뒤쫓아오는 그의 두 눈은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다만 그 고집이 나를 오늘 밤 저 세상으로 보내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뼈 공예 | 피의 가르침 | 전언

1막 4장

  

거지 소년의 눈이 공포로 흔들렸다. 일등 항해사의 뒤를 따라 선장의 처소로 향하던 중 어두운 복도 끝의 선실에서 흘러나오는 끔찍한 신음 소리가 소년의 발목을 물귀신처럼 붙잡았다.


비좁은 갑판 사이로 울리는, 데드 풀 호의 쥐새끼마저도 숨을 죽이게 만드는 비명. 누군가 겁에 질리기를 바라기라도 한 듯 선체에 메아리치는 그런 비명. 소년은 믿지도 않는 신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렀다.


일등 항해사는 어지러운 흉터가 거미줄처럼 새겨진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안쪽에서 들리는 절규에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둘은 선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괜찮아.” 일등 항해사가 말했다. “선장님은 네 얘기가 듣고 싶으실 거다.”


그리고는 나무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거구의 선원이 날이 넓고 굽은 칼을 등에 차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다. 사내는 일등 항해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소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두 눈은 오로지 선실 가운데 등을 돌리고 앉은 형체에 붙박여 있었다.


선장은 키가 큰 중년의 남성이었다. 굵은 목과 다부진 어깨에서 검은 그림자와 같은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말려 올라간 소매 아래 드러난 팔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년은 바로 옆 옷걸이에 걸린 삼각 선장모와 새빨간 외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갱플랭크…… 선장님…….” 경악을 금치 못한 소년의 목소리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일등 항해사가 소년의 등을 툭 쳤다. “선장님 이 아이의 얘기를 들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갱플랭크는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할 뿐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된 공기가 선실을 감쌌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그런 긴장감이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골똘히 작업대를 들여다봤다. 

그러자 거구의 선원이 소년을 앞으로 떠밀었다. 소년은 천 길 낭떠러지를 앞에 둔 것처럼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갔다. 금방이라도 풀썩 주저앉을 것 같은 가냘픈 두 다리가 바람 속의 나무마냥 떨렸다. 선장의 작업대가 시야에 들자 소년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소년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 위에는 다양한 크기의 칼과 갈고리가 널려 있었고 몇 개의 양동이 안에서는 더러운 물이 찰랑거렸다.


그리고 사람이 있었다. 햇빛을 보지 못해 시든 풀처럼 축 늘어진 그 남자는 겨우 머리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세차게 흔들리는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멍한 눈동자에는 절망이 늪처럼 고여 있었다.


소년은 눈을 돌리려 애썼지만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광경이었다. 눈 속에 몸을 묻은 것처럼 손발이,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무슨 얘기를 하러 이 지옥 같은 배에 올라탄 건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때 갱플랭크가 몸을 돌려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어둡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마치 죽은 자의 눈처럼. 먹이를 발견한 식인 상어의 눈처럼. 손에는 고급 붓이라도 되는 양 작고 날렵한 조각칼을 쥐고 있었다.


“요즘은 뼈 공예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갱플랭크는 다시 작업대로 시선을 옮겼다. 

“다들 성미가 급하니. 뼈를 조각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거든.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칼을 놀려야 하니까.”


소년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갱플랭크의 손끝에서 칼날이 만들어내는 조각으로부터 공포에 사로잡힌 큰 눈을 뗄 수 없었다. 나선형으로 꼬인 바다 괴물의 촉수와 파도. 그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남자가 헐떡이며 빌었다.


“제발……”


갱플랭크는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싸구려 위스키를 상처에 부었다. 지저분한 흔적을 씻어내려는 듯했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더니 곧 고개를 떨구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갱플랭크는 못마땅한지 고개를 돌리며 툴툴댔다.


“잘 봐둬라.” 소년에게 하는 말이었다. “충성스런 애들 중에도 주제넘은 짓을 하는 놈이 있게 마련이지. 그럴 땐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한다. 진정한 힘은 사람들이 너를 보는 시선에서 결정되는 거야.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끝장이거든.”


소년은 텅 빈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깨워라.” 갱플랭크가 기절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애들도 놈의 비명소리를 똑똑히 들어야지.”


데드 풀 호의 의사가 작업대 쪽으로 성큼성큼 발길을 옮겼다. 갱플랭크는 소년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지?”


“……그……그 남자요.” 소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고 있었다. “쥐 떼 소굴 부둣가에…… 그 남자가요…….”


“그래. 그놈이 뭐?”


“갈고리단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지만…… 저, 전 봤어요.”


“그래?” 갱플랭크는 시큰둥하게 답하며 작업대를 향해 돌아앉았다.


일등 항해사가 소년을 부추겼다. “계속 말씀드려라.”


“막…… 카드를 막…… 던졌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카드였어요.”


그러자 갱플랭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대한 기골로 인해 그 모습은 마치 심해의 괴물이 물 위로 솟구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놈을 어디서 봤지?”


권총집의 가죽끈이 냉혹한 손아귀 안에서 종이마냥 찌그러졌다.


“창고요. 판잣집 옆에 있는…… 큰 창고 근처에서 봤어요.”


갱플랭크는 소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투와 삼각 선장모를 옷걸이에서 낚아챘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고 눈에서는 광기가 이글거렸다. 

꺼질 듯 희미한 신음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소년과 일등 항해사는 조심스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바다뱀 은화 한 닢 쥐여주고 밥이나 먹여 돌려보내.” 갱플랭크는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하며 선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빛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같이 거대한 격분이 선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애들 불러라. 본때를 보여줄 시간이다.”

  


출처 : 리그 오브 레전드


[COLLECTING/LOL] - [LOL 단편소설] 시궁쥐와 고양이와 네온 생쥐

[COLLECTING/LOL] - [LOL 단편소설] 라이즈&브랜드 - 잿더미에서

[COLLECTING/LOL] - [LOL 단편소설] 라칸 - 대롱활이 좋을까, 활대롱이 좋을까

[COLLECTING/LOL] - [LOL 단편소설] 벨코즈&리산드라 - 심연의 눈

[COLLECTING/LOL] - [LOL 단편소설] 야스오, 리븐 - 부러진 검날의 고백 [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