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L 단편소설]
야스오, 리븐
부러진 검날의 고백 [1]
- I -
예리한 쟁기날이 울퉁불퉁한 겉흙을 파고들어가더니, 겨우내 잠들어 있던 아래 쪽 흙을 봄 하늘 아래 드러냈다. 리븐은 황소가 끄는 쟁기 뒤를 따라 조그마한 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팔을 넓게 벌려야 잡을 수 있는 손잡이를 눌러 쟁기를 안정시키는 한편,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외국어 단어를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에마이. 파이르. 스바사. 아나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비옥한 흙 냄새가 공기 중에 피어올랐다. 리븐은 나무 손잡이를 꽉 잡고 걸었다. 요 며칠 동안 밭을 갈다 보니 겨울에 사라졌던 굳은살이 다시 올라왔고, 대신 기억은 흐려졌다.
리븐은 입술을 깨물며 잡생각을 떨쳐내고 지금 하고 있는 두 가지 일에 집중했다. “어머니. 아버지. 자매. 형제.”
야위어서 갈비뼈가 드러난 황소는 쟁기를 끌면서 연신 한쪽 귀를 쫑긋거렸다. 쟁기날에서 흙덩이와 조그마한 돌멩이가 튀어올라 리븐을 때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올이 거친 셔츠를 입고 흙 얼룩이 진 소매를 말아올려 두툼한 끈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같은 천으로 만든 바지는 흙물이 들어 누런 색이었다. 바짓단은 원래 주인에게는 이제 너무 짧겠지만, 리븐에게는 맨살이 드러난 발목과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조악한 신발에 스칠락 말락 한 길이였다.
“에마이. 파이르. 스바사. 아나르.” 리븐은 기억을 더듬으며 주문처럼 단어들을 외웠다. “에르자이, 아들. 디에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눈썹 아래로 늘어졌다. 리븐은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한 손을 들어 소맷자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녀의 양팔은 근육이 탄탄했고, 한 팔만으로도 쟁기를 어렵지 않게 제어할 수 있었다. 밭의 주인인 늙은 농부는 조금 전에 물이 든 가죽 자루와 점심을 가지러 집으로 갔다. 농부는 리븐에게 잠시 일을 멈추고 길 가장자리의 숲 그늘에서 쉬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리븐은 일을 끝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땀에 젖은 리븐의 목덜미를 스쳐지나갔다. 리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녹서스 제국은 아이오니아를 굴복시키려 했고, 아이오니아가 무릎을 꿇기를 거부하자 아예 부숴버리려 했다. 리븐은 정신을 집중하고 천천히 쟁기 뒤를 따라 걸었다. 녹서스 제국이 그렇게 기를 썼건만, 결국 이 땅에는 봄이 찾아들었다. 녹서스가 쫓겨난 지도 일 년이 족히 넘었고, 비와 진흙으로 회색과 갈색투성이였던 대지에는 초록색 새싹이 가득 피어났다. 대기조차도 새출발을 하리라 마음 먹은 듯했다. 희망. 리븐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카락이 턱까지 내려왔다.
“디에다, 딸.”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다시 주문과 같은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양손으로는 쟁기의 나무 손잡이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에마이. 파이르.”
“파-이르라고 해야지.” 느닷없이 숲 속 그늘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븐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손에 쥔 쟁기 손잡이가 휘청 했고, 그 서슬에 가죽 고삐가 확 당겨지는 바람에 삐쩍 마른 황소도 제자리에 섰다. 쟁기날이 묵직한 흙덩어리를 호되게 들이받았고, 그 안에 있던 돌멩이가 날에 부딪히며 금속성의 “카랑”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목소리는 늙은 농부의 것이 아니었다.
리븐은 입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소리는 한 명이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리븐은 몇 년 동안이나 훈련을 받았기에 즉각 방어 태세를 취할 수도 있었지만, 대신 느릿느릿 움직여 목소리가 들려온 쪽과 자신 사이에 쟁기와 황소가 놓이도록 방향을 틀었다. 몸은 지나칠 정도로 가벼웠다. 리븐은 쟁기 손잡이를 꽉 틀어쥐었다. 몸을 고정시키려면 옆구리 쪽에 묵직한 지지대가 필요했다. 오른쪽 허리에 조그마한 채집칼을 차고 있기는 했지만, 그 작고 구부러진 날로는 야생 사과 꼭지나 딱딱한 풀줄기를 자르는 게 고작이었다.
“파-이르가 맞아.”
목소리는 밭 가장자리, 짙은 소나무 숲과 농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들려왔다.
“중간에 살짝 늘어져야 한다고.” 남자는 앞으로 걸어오며 다시 말했다. 검고 숱 많은 머리카락을 뒤로 당겨 묶었고, 거친 천 망토를 어깨에 둘렀지만 왼쪽 어깨의 금속 견갑과 검집도 없이 허리에 찬 검이 그대로 드러났다. 전사인 것은 분명했지만 어느 가문을 섬기거나 어딘가에 소속된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떠돌이 검사였다.
위험해. 리븐은 그렇게 판단했다.
“파-이르.” 남자가 다시 말했다. 정확한 발음이었다.
리븐은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을 하면 억양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였다. 그녀는 남자와 자신 사이에 쟁기가 놓이는 방향으로 몇 걸음 옮겼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고정하고는 몸을 숙여 돌멩이에 걸린 쟁기날을 살펴보는 척했다. 진흙을 가르도록 날을 세운 쟁기날이니만큼 채집칼보다는 쓸모가 있을 터였다. 오늘 아침에 늙은 농부가 쟁기날을 틀에 고정시키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니,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전에 여기 있을 때는 널 못 본 것 같은데. 하기야 세월이 좀 지났지.” 남자가 말했다. 떠돌이 생활을 꽤 오래 한 듯, 목소리에는 투박함이 묻어났다.
리븐은 침묵을 지켰다. 아까부터 있었던 벌레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치안판사들이 수마 원로가 사망한 사건에 대해 새로운 증거를 찾으려고 공판을 열 거라던데.” 남자가 말을 이었다.
리븐은 남자를 무시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황소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가축에 씌우는 굴레의 전문가라도 되는 듯한 손길로 등에 얹은 가죽 끈을 쓸어주는 한편, 커다랗고 검은 눈에 몰려드는 각다귀를 쫓아주었다.
“하기야 네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건은 잘 모르겠구나.”
리븐은 그 말에 고개를 들고 낯선 남자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물론 남자와 자신의 사이에 황소를 방패로 둔 상태에서. 남자의 콧대에는 긴 흉터가 나 있었다. 리븐은 저 흉터를 남긴 사람은 지금 살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남자의 눈길은 단단했지만 그 아래에는 호기심이 얼핏 엿보였다. 문득 얇은 가죽으로 만든 신발바닥을 통해 땅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천둥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누가 오는군.”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리븐은 늙은 농부의 집이 있는 언덕을 향해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무장을 하고 말을 탄 사람 여섯이 막 등성이를 넘어 쟁기질을 해놓은 밭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기 있다!” 그 중 한 남자가 억센 말투로 소리쳤다. 리븐은 그토록 오랫동안 배우려고 기를 썼던 억양의 미묘한 차이를 분석해 보았다.
“그런데… 혼자가 아닌데?” 다른 남자가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람이 불어와 쟁기와 리븐을 휩쓸고는 숲의 그늘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리븐은 낯선 남자가 서 있던 쪽을 돌아보았지만 남자는 자취를 감춘 후였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수들이 정체를 궁금해할 여지도 남기지 않고.
“유령인가 보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맨 앞의 남자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저 여자애가 베어버린 누군가가 복수를 하러 나타났던 걸 거야.”
기수들은 말에 박차를 가하더니 오늘 아침 리븐이 갈아놓은 이랑을 마구 짓뭉개며 그녀를 빙 둘러쌌다. 우두머리 남자가 탄 말 뒤쪽에는 천으로 둘둘 말아놓은 뻣뻣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리븐의 시선이 그 말을 따라가는 동안 다른 말들이 그녀를 포위했다. 말굽에 밟힌 부드러운 흙이 그 아래 차갑고 단단한 진흙 속으로 파고들었다.
리븐은 마지막으로 쟁기날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기수 중 두 명은 석궁을 가지고 있었다. 쟁기날에 손을 대기도 전에 석궁 화살이 날아들 게 뻔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쟁기날을 건드리고 싶어 꿈틀거렸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오랫동안 투쟁을 위해 훈련받은 몸은 쉽사리 진정하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솟구치면서 귀가 먹먹해졌고, 머리 안쪽이 망치로 두들기는 듯 쿵쿵 울렸다. 넌 죽을 거야. 머릿속에서 고함 소리가 울렸다. 그렇다면 저놈들도 저승길에 동행시켜야지.
리븐의 손가락이 서서히 쟁기날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앨 놔둬요!” 농부의 아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는 틈에 리븐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멈출 수 있었다. “아사, 빨리 와요! 어떻게 좀 해보라고요.” 말 안 듣는 소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단련된 목청이었다.
리븐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기수들이 멈춰섰다. 늙은 농부와 농부의 아내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리븐은 뺨 안쪽을 꽉 깨물었다. 그 쩌릿한 통증 때문에 싸우고 싶은 욕망이 누그러졌다. 저들의 밭에 아이오니아 인의 피를 뿌릴 수는 없었다.
“우리가 일을 끝낼 때까지 집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우두머리가 농부 부부에게 말했다.
늙은 농부 아사는 절룩거리며 밭으로 들어섰다. “그 앤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건 제가 가져온 거예요.” 농부는 말등에 얹힌 꾸러미를 가리켰다. “그러니 제가 책임지겠어요.”
“콘테 영감. 오-파.” 우두머리가 말했다. 남자의 얇은 입술 한쪽 끝에 상대를 깔보는 미소가 걸렸다. “영감은 이 여자애가 누군지 알고 있지? 이 앤 나쁜 짓을 수도 없이 저질렀어. 내가 마음대로 할 수만 있었다면 이 앤 이미 시체가 되어 있을 거야.” 남자는 리븐을 내려다보더니 짜증스러운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러니 할 말이 있거든 공판에서 하라고.”
우두머리가 말하는 동안, 리븐은 양발이 축축한 흙에 깊숙이 박혀 있었기에 그나마 꿋꿋이 서 있을 수 있었다. 수렁에 빠졌다는 좌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맥박이 얕고 빠르게 뛰었고, 등 뒤 날개뼈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리븐의 머릿속을 차차 다른 시간, 다른 밭의 광경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군마들이 연신 코를 힝힝거리며 피로 물든 흙을 말굽으로 짓밟는 밭이었다.
기억 저편에서 더 끔찍한 공포가 밀려와 자신을 덮치기 전에, 리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깊숙이 들이켰다. 봄비가 이 땅을 적시는 거야. 시체들이 아니라. 리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눈을 뜨면, 살아 있는 사람들만 보일 거야.
리븐은 눈을 떴다. 밭은 그대로였다. 파헤친 무덤이 아니라 금방 갈아놓은 흙이었다. 우두머리가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손에는 아이오니아 금속으로 만든 쇠고랑을 들고 있었다. 리븐의 고향땅에서 범죄자에게 채우던 족쇄보다는 훨씬 정교했고 소용돌이 형상이었다.
“녹서스의 개 주제에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우두머리의 얼굴에는 잔잔한 승리감이 내비쳤다.
리븐은 쟁기날에서 눈을 들어 농부 부부를 바라보았다. 얼굴의 주름살에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이 새겨져 있었다. 저들에게 또다른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리븐은 부부가 서로에게 기대어 꼭 껴안고 있는 장면을 눈앞에 떠올렸다. 무슨 비극이 벌어질지 직감하고 저항 아닌 저항을 하는 모습이었다. 늙은 농부가 땀에 젖은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는 순간, 리븐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리븐은 우두머리 쪽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눈길은 차가웠으나 입에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리븐의 손목에 차가운 금속이 와 닿았다.
“걱정 말아라, 디에다.” 농부의 아내가 소리쳤다. 잔뜩 긴장한 목소리였지만 희망이 섞여 있었다. 너무 많은 희망이. 너무 지나친 희망이. 농부 부부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와중에도 바람이 갓 쟁기질한 흙냄새와 더불어 긴장 섞인 그 목소리를 실어왔다. “디에다.” 목소리가 속삭였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말해 줄게.”
“디에다.” 리븐은 그 속삭임에 답했다. “딸.”
소녀가 잡혀간 후 이틀 동안, 샤바 콘테는 남편이 느릿느릿한 손길로 짓밟힌 밭고랑을 다듬고 씨를 뿌리는 일을 돕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소녀가 했더라면 훨씬 쉽게 해치웠을 일이었다. 아니, 아들들만 살아 있었어도 늙은 부부가 직접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공판이 열리는 날 아침은 쌀쌀했다. 시내까지는 먼 길인데다 나이 먹은 발걸음으로는 더욱 오래 걸릴 것을 알았기에, 부부는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서 공회당으로 향했다.
“그 애가 녹서스인이란 게 알려진 거야.”
“걱정도 많수.” 샤바는 그렇게 대꾸하며 혀를 쯧쯧 찼다. 그러다가 그렇게 혀를 차는 게 남편 아사보다는 닭들을 진정시키는 데 더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편에게 희망찬 미소를 지었다.
“녹서스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유죄 판결을 내릴 걸.” 아사는 집에서 짠 천으로 만든 옷깃 속에서 우물우물 말했다.
젊은 시절 말 안 듣는 가축들을 도축장으로 모는 일을 했던 샤바는 우뚝 멈춰서서 남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우리만큼 그 애를 모르잖아.” 샤바는 손가락으로 남편 가슴을 쿡 찔렀다. 그 손짓에 분노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애가 좋은 사람이란 걸 말해 주란 말이야.”
아사는 아내의 성격을 잘 알았다. 아무리 말해도 아내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그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바는 불만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말없이 길을 재촉했다. 공회당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샤바는 되도록 앞쪽 자리를 잡으려고 재빠르게 공회당 나무 긴 의자와 사람들 틈을 뚫고 들어가다가… 쿨쿨 자고 있는 남자의 한쪽 다리에 발이 걸렸다.
샤바는 작게 악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잠들어 있던 남자는 끙 하고 신음하더니,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샤바의 한쪽 팔을 잡아챘다. 덕분에 샤바는 돌바닥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남자의 손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발밑을 조심하셔야지요, 오-마.” 낯선 남자가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숨결에는 술냄새가 짙게 배어났지만 발음은 전혀 꼬이지 않고 정확했다. 남자는 샤바가 똑바로 서는 즉시 팔을 놓아주었다.
샤바는 이 괴상한 구원자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훑어보는 눈길에 남자는 망토로 어깨와 얼굴을 감쌌다. 강인한 콧대에 난 희미한 흉터도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공회당은 밤새 술이나 마신 사람들이 쉬는 장소가 아니라우, 젊은이.” 샤바는 옷깃을 바로잡았다. 턱끝을 쳐드는 동작에서 업신여기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늘 여기서 한 여자의 생사가 결정돼요. 치안판사님들 앞에서 당신 악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든 썩 나가요.”
“임자.” 아사가 다가와 한 손을 아내의 팔에 얹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성질 좀 죽여야 하지 않겠소. 저 사람은 해를 끼칠 의도는 아니었잖아. 그냥 냅둡시다.”
망토를 눌러쓴 남자는 평화를 바란다는 몸짓으로 손가락을 두 개 들어보였지만, 여전히 얼굴은 망토에 가린 채였다. “문제의 핵심을 찔러들어가시는군요, 오-마.” 남자의 목소리에는 익살스러운 기운이 스며 있었다.
샤바는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아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내를 섣불리 평가하지는 말아주게, 젊은이.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무고한 영혼이 유죄 판결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중이라서 그렇다네.”
망토를 쓴 남자는 알겠다는 듯 낮은 소리를 냈고, 노인은 아내를 따라 걸어갔다. “그 점에선 같은 마음입니다, 오-파.”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놀란 노인은 뒤를 돌아보았으나, 남자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미풍 한 줄기만이 남아 옆에서 대화에 한창 빠져 있는 어느 부부의 옷자락이 잠시 바스락거렸다. 망토를 두른 남자는 이미 공회당 저쪽의 어둠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샤바는 모여든 군중 앞쪽의 자리를 택했다. 나무 긴 의자의 매끄러운 소용돌이 문양은 나무술사들이 시민의 의무에 대한 조화로운 토의와 균형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기에 편안해야 했지만, 샤바는 도무지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편을 흘긋 보았다. 아사는 삐걱거리는 낡은 걸상에 가만히 앉아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집행관 한 명이 서서 나무조각으로 이를 쑤시고 있었다. 샤바는 그 집행관이 멜케르, 즉 리븐을 잡으러 왔던 기수들의 우두머리임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멜케르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멜케르는 강당 뒤편에 자리한 문 여러 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문들이 열리고 어두운 빛깔의 망토를 걸친 사람 세 명이 나오자, 멜케르는 얼른 몸을 똑바로 펴고 입에 넣었던 나무조각을 내던졌다.
세 명의 치안판사들이 강당 앞쪽의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 동안, 그들이 입은 법복의 매끄러운 천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치안판사들이 사람들로 가득 찬 강당을 한 번 훑어보자, 시끌시끌하던 소음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바뀌었다. 치안판사 중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매가 연상되는 콧날의 여자가 엄숙한 태도로 일어섰다.
“이번 공판은 수마 원로 사망 사건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리는 것입니다.”
주민들 한가운데쯤에서 메뚜기떼의 날갯짓 소리 같은 웅얼거림이 퍼져나왔다. 판사가 말한 새 증거에 대해 들어본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이 중에 녹서스인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모여든 것이었다. 하지만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없었다. 수마 원로의 죽음은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그의 명상실을 빛나게 했던 마법, 바람의 검술만으로 증거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수마 원로 자신을 제외하면 그 검술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던 상처가 벌어졌다. 공통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었다. 강당 안은 고함 소리로 가득 찼다. 수마 원로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마을 주민들이 그렇게 무더기로 죽어나가지는 않았으리라. 수마 원로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녹서스 부대의 절반 병력이 나보리로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녹서스와의 교전에서 수많은 아들과 딸들이 죽었다. 수마 원로만 살아 있었더라도 그렇게 처참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더 나쁜 일은, 마을 주민 중 한 명에게 그 책임이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크고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마 원로를 살해한 사람이 누군지 우린 벌써 알고 있잖아요.” 풍파를 겪어 쭈글쭈글해진 샤바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바로 배신자 야스오지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말에 동의하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수마 원로의 바람의 검술을 누가 알고 있었죠? 야스오지요!” 샤바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요네는 그 용서 못할 동생을 찾으러 갔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 비겁한 야스오가 요네의 행방과도 관련이 있는 게 거의 틀림없어요.”
이번에는 군중들이 이를 갈며 야스오의 피를 바라는 웅성거림이 터져나왔다. 샤바는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긴 의자에 앉았다. 누가 죄인이냐는 물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놓은 것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매가 연상되는 콧날의 판사는 오래 전부터 제아무리 심하게 꼬인 옹이도 곧게 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나무술사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밤색에 반들반들 닳은 완벽한 모양의 나무 구체 하나를 들어올려 새까만 받침대에 단호한 동작으로 내려놓았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고 공회당 안은 순식간에 질서를 되찾았다.
“본 공판은 수마 원로 사망에 얽힌 사실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판사가 말했다. “당신은 이해를 훼방 놓고 싶으신가요? 이름이…?”
샤바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뺨이 확 달아올랐다. “콘테. 샤바 콘테입니다.” 그녀는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말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사는 걸상에 앉은 채 아내를 바라보다가 숱이 줄어들고 있는 정수리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까도 말했듯, 우리는 새로운 증거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매 같은 얼굴의 판사는 입을 열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군중을 한 차례 훑어본 다음 집행관 멜케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여자를 데리고 오도록.”
출처 : 리그 오브 레전드
[Collecting/흥미] - [LOL 단편소설] 루시안 - 그림자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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