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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NG/지식

인플레이션의 아버지, 존 로(John Law) -1

by Captain Jack 2018. 7. 2.

 

인플레이션의 아버지,

존 로(John Law) -1






너무 너무 재미있다. 역사는 돌고 돌아 반복된다. 'WHY' 를 이해하자! 

▽ 가상화폐의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한 역사공부



페터슨이 잉글랜드에 중앙은행 설립에 박차를 가하던 그 해 런던에서는 한량 하나가 황급히 바다 건너 유럽으로 도망을 갔다. 

그가 냅다 도망을 친 이유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죄목은 살인.


몸 좋고 제법 잘 생긴, 그리고 지력과 재력을 겸비한 청년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기 마련이다. 그 역시 주변 여자들 사이에서 제법 주가가 높았는데, 치정 문제에 얽혔다가 다른 남자와 결투를 벌이게 된다. 결과는 승리. 하지만 결투 과정에서 상대방이 죽었기 때문에 그는 법정 구속 되어 사형을 선고 받기에 이른다. 

 

그렇게 감옥에 있다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나 싶었는데...

상급심에서 갑자기 벌금형이 선고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 시절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의 석방은 세간에 상당한 구설수로 오르내리고, 결국 그는 다시 잡혀 수감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또 얼마 가지 않아 아예 탈옥을 감행해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구설수에도 오르지 않겠다는 의도로 아예 국외로 줄향랑을 쳐 버렸다.  

 

사건의 배후에는 아마도 유력자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지만, 정확히 밝혀진건 없다. 9년 전쟁을 치르느라 여념이 없던 잉글랜드에서 그 흔한 치정 살인과 살인범 탈옥에까지 관심을 두고 추적할만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던 모양이다. 따라서 그 도망자가 이후에 한 나라를 뒤집어 놓을, 아니 더 나아가 역사를 뒤흔들만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범죄자의 이야기는 조금 더 뒤에 하기로 하고, 당시 유럽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9년전쟁은 루이14세의 위엄만 확인해 준 채,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유럽인들 사이에 전쟁이 끊길리 없었다. 전쟁은 유희요, 곧 스포츠이거늘, 전쟁이 없어 답답해 좀이 쑤시던 이들에게 오래 지나지 않아 몸을 풀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스페인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사건 자체는 매우 단순했다. 그냥 한 남자가 죽은 일일 뿐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사람의 직위가 국왕이었다는 점. 그리고 아들이고 딸이고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 남자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마드리드에는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

 

Q : 우리나라에는 세상에 단 한번도 쓰지 않은게 세 가지가 있어. 그게 뭔지 알아?

A : 물론이지. 추기경님의 서재, 메디나 공작의 검, 그리고 우리 왕비님!

 

지금에서야 '이게 무슨 여성혐오적 드립이냐'며 큰일 날 소리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혐오고 자시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대에 국왕이란 존재는 단지 권력만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속민들에 대한 의무가 있었으니,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속령과 속민을 지켜야 했고, 후계자를 잘 낳아 안정된 지배구조를 유지해야 했다.

 

왕비가 쓰이지 못했다는 후계구도 불안하다는 이야기이고, 후계구도가 불안하다는 이야기는 즉, 그 나라의 왕위를 두고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전쟁이 벌어지면. 속민들, 즉 민중들이나 중소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이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으니, 그들의 왕비 드립은 혐오가 아니라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카를로스 2세는 부인이 한 명도 아니었다. 오를레앙의 마리-루이즈, 그리고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이렇게 두 명과 결혼을 했다. 물론 한번에 둘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리-루이즈와 한 번, 그리고 그가 죽은 뒤 마리아 안나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다. 암튼간에, 스페인 국왕와 두 왕비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의 유전병이 문제였을까? 

 

어쨌든 카를로스 2세는 후계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국왕의 소명은 다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장애가 있었으나 지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고 본인과 본인의 나라가 처한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여 후계자를 점찍어 두고 유언장도 마련해 두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전 유럽이 발칵 뒤집힌다. 

 


"나의 조카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가 내 왕위를 잇는다. 

단, 그는 프랑스의 왕위를 받아서는 안된다."

  


앙주 공 필리프는 카를로스 2세의 누나인 마리 테레즈의 손자다. 그런데 마리 테레즈가 누군고 하니, 바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아내다. 즉, 앙주공 필리프는 루이 14세의 손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바로 프랑스 왕세자 루이. 필리프는 루이의 큰 아들은 아니었으나, 프랑스는 여성에게 왕위 계승권이 없으므로 형인 루이가 아들이 없을 경우는 프랑스 왕위에 오를 자격을 갖추게 된다. 따라서 프랑스 왕위에 관한 문제를 매듭짓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카를로스 2세가 필리프를 후계자로 지목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완전 포기할 것을 강요한 이유는 스페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만일 별다른 조건을 내걸지 않고 그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 줄 경우, 자칫하다가는 스페인이 프랑스에 통채로 넘어가는 일이 발생 할 수도 있다. 

 

당시에는 서서히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던 시기였던지라, 카를로스 2세도 '국가'라는 관점에서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설령 왕이 한 집안 사람일지언정, 스페인과 프랑스는 엄연히 다른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자, 프랑스 국왕 계승권을 포기하라 요구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합병될 경우, 자신의 집안 사람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 위해가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그의 결정에 한 몫 했다.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난리가 났다. 당시는 아직, 나라가 왕 개인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던 시절인지라, 카를로스가 앙주공 필리프를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점은 곧, 합스부르크 가문의 재산이 다른 집안에게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레오폴트에게는 요제프와 카를, 두 아들이 있었다. 레오폴트는 내심 카를로스 2세가 죽으면 왕위는 아들 카를에게 넘어가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겐 아들이고 딸이고 자식이 없었기에, 부계 기준으로 보면 가장 가까운 카를이 왕위를 이어 받는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부계, 모계 다 합치면 순위가 복잡해지므로, 그 보다 가까운 왕자들이 '왕위는 내거!' 라고 달려들지 모른다. 그래서 카를은 미리 다른 나라 군주들에게 '만일 카를로스 2세가 죽는다면, 내가 스페인 왕이 될테니, 때가 되면 나의 왕위를 인정해 주시오. 거 우리는 이름도 같지 않소?' 라며 밀약을 맺었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카를의 뜻을 따라줄 이유가 없었다.오히려 그가 그 따위 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듣고 심기가 뒤틀렸는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다른 집안 소속 친척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결심했다. 

  

이 와중에 루이14세가 욕심을 부렸다. 스페인 국왕 자리가 손자 필리프에게 넘어오자, 이 참에 아예 스페인을 프랑스의 속령으로 만들 궁리를 했다. 그리 되면 프랑스는 피레네 산맥 남북으로, 그리고 대서양과 지중해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유럽 서부의 최강 패권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루이14세가  '프랑스와 스페인 통합도 고려하고 있음'을 알리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수장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이기도 한 레오폴트는 격분하여,

 

"만일 왕관이 우리 가문으로 넘어 온다해도, 우린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합칠 생각이 없음"

 

이라 선언했다. 즉 스페인은 별도의 나라로 이어지리라 천명한 것이다. 

 

루이 14세의 행보에 많은 유럽 군주들이 불안감을 표출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 툭하면 저지대나 라인강변을 들쑤시던 인간이었다. 여기에 스페인과 그 속령들이 넘어가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다.

 

오스트리아도 오스트리아이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자 네덜란드의 총독이기도 한 윌리임 3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힘을 합친다는 이야기는 바다에 강력한 적이 생겨 통상에 방해가 된다는 이야기다. 


더 나아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안보가 통합 왕국에 의해 직접적으로 위협 받는다는 의미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잉스네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네덜란드를 임의대로 붙였음) 오스트리아 연합은 프랑스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연합군을 결성했다. 

 

신성로마제국 소속의 나라들은 대부분 수장인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다. 라인강변은 직접, 그리고 다른 영방국들도 간접적으로 프랑스에 의해 자국의 존속을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이에른과 쾰른은 그렇지 않았다. 이네들의 지배자 비텔스바흐 가문은 내심 합스부르크 기세를 누르고 본인들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모습을 꿈꿨다. 따라서 그네들은 프랑스 편을 들어 오스트리아의 힘을 누르고자 했다.

 

이베리아 반도내에서도 편이 갈렸다. 인도양에서 잉스네에게 열세를 면치 못하던 포르투갈은 프랑스 편에 붙었다. 잉스네에게 타격을 주어 해상교역로에서의 위상을 되찾고자 함이었다. 


반면에 아라곤과 카탈루냐, 발렌시아는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다. 그네들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카스티야 중심체제를 견제하고, 본인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정리하자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명목상으로는 '스페인 왕위가 누구에게 가야 하나?' 라는 이유로 벌어졌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참전국들은 자국의 안보와 국익을 위해 싸웠다.  

 

연합군에는 원투 펀치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저지대-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에서 활약을 벌이다 합류, 블래넘에서 프랑스를 영혼까지 털어벼렸다. 

 

사부아의 공작과 말보로 공의 대활약 속에 저지대와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던 프랑스군은 모조리 쫓겨났다. 그래도 프랑스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군의 작전 범위가 좁아지면서 방어력도 덩달아 증가했다. 외젠과 처칠의 승전은 계속 되었으나 프랑스군의 방어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상황이 변했다. 

 

잉글랜드 국왕 앤이 자신의 친구 사라와 결별하고, 의회 다수당이 휘그에서 토리로 바뀌었다. 

 

국왕 앤의 친구인 사라의 남편은 바로 영국군  (전쟁이 한창이던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서로 나라를 합쳤으므로, 이제부터는 영국이라 칭한다.) 사령관 존 처칠. 


사실 존 처칠이 영국군 사령관이 될 수 있던 이유는 사라가 친구이자 국왕인 앤에게 열심히 로비를 펼친 덕분이었다. 이제 그가 왕에게 내쳐지자, 자연스레 남편인 말보로 공도 사령관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다. 

 

아울러 의회의 주인으로 새로 집권한 토리당은 '우리는 그냥 바다만 지키면 되지, 굳이 유럽 대륙에의 일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며 전쟁에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했다. 


영국은 프랑스와 협상을 벌였다. 영국이 발을 빼는 댓가로 프랑스는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제임스 3세에 (제임스 2세가 50 넘어 봤던 그 아들)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연합군의 큰 축 하나가 이렇게 빠져 나갔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상황도 변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아들 없이 죽으면서 동생 카를이 카를 6세라는 이름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만일 카를 6세가 스페인 왕까지 겸하게 되면 이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하나의 왕 아래 합쳐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각 세력들은 열심히 짱구를 굴려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바로 필리프의 왕위를 인정하되, 그와 프랑스와의 관계를 절연토록 한 것이다. 

 

스페인령인 저지대 남부 (지금의 벨기에), 나폴리, 밀라노, 사르데냐는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갔다. 지브롤터는 영국에게 넘어 갔고,  시실리는 사부아에게 넘어 갔다.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 무역권도 영국에게 넘어갔다. 이래저래 전쟁으로 인해 스페인은 강대국으로서의 위용을 완전히 상실했다. 


급기야 100년 뒤에는 나폴레옹으로부터 '피레네 이남은 아프리카' 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사실 200년전에는 아프리카가 더 선진지역이었지만) 

 

프랑스 입장에서는 어찌되었든 손해는 없어 보였다. 왕령을 양보한 것은 스페인이지 본인들이 아니었다. 알사스를 지켜냈고, 로렌도 여전히 본인들 세력권 아래 있었다. 저지대 남부와 밀라노가 오스트리아로 넘어갔지만 심각한 위협 거리는 아니었다. 스페인과 통합은 실패했지만, 최소한 동맹국으로서는 남겨 둘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잃은게 없어 보였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프랑스는 분명 크게 약해졌다. 군사적으로는 어쩔지 몰라도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프랑스의 미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루이 14세는 바닥난 재정이 향후 어떤 여파를 미치게 될 것인지 아직 예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의 말년에 프랑스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왕실도 전염병을 피하지 못했으니, 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루이와 루이의 큰아들 루이, 그리고 루이 아들 루이의 아들 루이가 연달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전염병에서 용케 살아 남은 막내 손자 샤를마저 사고로 죽으면서 프랑스 왕가에 드리워진 비극에 정점을 찍게 된다. 

 

사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살펴보면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있나 싶을 때가 있다. 유럽 각 국이 우려하던 상황 즉 '스페인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 통합되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가 처음 스페인 국왕 후계자로 지목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루이, 형 루이, 동생 샤를이 모두 살아 있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전염병 때문에 아버지, 형, 동생, 심지어 큰 조카까지 모두 죽어버려 만일 그가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포기 하지 않았다면 프랑스 왕까지 겸임하여 (막내조카 나이가 너무 어렸으니) 정말로 프랑스-스페인 통합 왕국이 탄생했을 수도 있다. 

 

만일 스페인 국왕 자리가 합스부르크가의 카를에게 넘어 갔다면, 형 요제프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음에 따라, 그 자리를 이어 받아 200년전의 카를 5세때처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다시 합쳐지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만일 그랬다면, 카를 역시 아들을 낳지 못해 합스부르크 대가 끊기면서 나중에 더 큰 혼란이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암튼간에 치세 기간 동안 온 유럽이 대 프랑스 전선을 필칠 정도로 맹위를 떨쳤던 루이 14세이지만 자식 손주들이 모두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면서, 말년은 매우 비참한 심정 속에 살아야 했다. 막내 손자 샤를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쇠약해진 루이 14세는 얼마가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왕위를 이어 받은 이는 마지막 남은 증손자. 

다섯살짜리 꼬꼬마 루이. 

그가 루이 15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국왕에 오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왕가를 뒤엎을 먹구름도 서서히 몰려 오고 있었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armada1588/221303453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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