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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NG/지식

과거 이슬람 문화권의 반전

by Captain Jack 2018. 7. 8.

 

과거 이슬람 문화권의 반전

 

▽ 지금의 이슬람 대장인 사우디얘들 만나보면 엄청 문화적으로 떨어지던데 ...



1,2,3,4,5...

우리가 지금 쓰는 이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른다.





왜 아라비아 숫자인가? 

이 숫자 체계를 처음 만든 곳은 인도다. 


이를 널리 퍼트린 이들이 이슬람교 상인인데, 이슬람교의 대표자들이 아랍인이라서 아라비아 숫자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무슬림 페르시아인들이 알렸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과 동쪽이 처음으로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는 1세기 초 한 왕조와 파르티아, 그리고 로마가 번성하던 시절이다. 이 시기 로마 황제가 보낸 사절이 낙양에까지 이른 적도 있었다. 세 제국이 모두 무너진뒤, 교역은 잠시 막혔다가,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 교역로가 다시 열렸다.


이슬람교가 일어선 이후 이들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서쪽으로는 스페인, 동쪽으로는 카자흐스탄까지 세력을 펼쳤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소위 블랙 아프리카까지 상권을 넓혔다. 다만 북쪽으로는 프랑크와 동로마, 그리고 캅카스 산맥에 막혀 더 이상 세를 불리지 못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이슬람 세계의 맹주는 아바스 왕조였다. 아바스 조 수도 바그다드는 콘스탄티노플, 코르도바와 함께 유라시아 서부 지역에서는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략 런던이나 파리 정도는 되는 도시였다. (뉴욕이 아닌 이유는 당의 수도 장안이 있기 때문이다.)


티그리스 강 유역에 있는 바그다드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운하로 연결 되었고, 강을 통해 바다로 가는 출구인 바스라와 연결 되었다. 북동쪽은 이란과, 북서쪽은 시리아와 남동쪽은 메소포타미아 남쪽과 남서쪽은 아라비아 및 이집트와 육로로도 연결 되었다.


도시에는 각지에서 몰려온 상품들로 가득 찼다. 중국에서 건너 온 비단, 모술에서 넘어 온 면직물, 인도에서 건너 온 쌀과 직물. 이집트에서 온 밀,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가져온 사탕수수 등등. 도시에는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었다.


부는 넘쳐 흘렀고, 기회를 찾아 온 사람들이 도시에서 북적였다. 전성기 때 바그다드 인구는 약 50만에 달했다. 이는 바그다드 서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콘스탄티노플 (약 40만) 보다도 많은 수치였다. 물론 동쪽에다 비비면 당의 장안에 밀리긴 하지만 말이다.





바그다드 번영의 토대에는 활발한 정복 사업이 있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슬람인들의 정복은 가히 ‘정녕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들인가!’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만하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한 것이 622년. 그로부터 불과 100여년 뒤에 이슬람 제국은 국경이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프랑스와, 동쪽으로는 당나라와 마주할 정도로 세력을 넓게 확장했다.


그것도 당대 유라시아 서부지역 최강자인 동로마와 페르시아를 영혼까지 털면서 말이다.


이슬람 지배층은 정복 활동을 통해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곡창지대인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점령하면서 밀셔틀을 확보했다. 시리아를 비롯한 레반트 지역과 이집트에 사는 기독교도들이 세금 셔틀을 해 줘서 재정도 충분히 확보했다. 페르시아 정복을 통해서는 그들이 쌓아왔던 부를 통째로 거머쥘 수 있었다.


광산개발도 활발히 진행했다. 이집트 남부의 누비아와 수단에서 금광 개발에 박차를 올리고, 아르메니아와 호라산 등지에서도 광맥을 잡아냈다. 힌두쿠시의 바자히르에서 나온 은광도 쏠쏠한 수입원이 되었다. 이집트에서 옛 파라오의 무덤도 파헤쳐서 황금 부장품도 약탈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도시광인 셈이다.)


당대 이슬람 정권은 다른 어떤 문화권보다도 상인과 그들의 재산을 보호했다. 애초에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하마드부터 상인이다보니 상인들의 지위가 낮을리 없었다. 풍부한 부와 신분 보호는 상인들의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들은 더 많은 교역 기회를 찾아서 바다로 나섰다.


상인들은 계절풍을 적극 활용했다. 가을이 되면 페르시아나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남쪽으로 뱃길을 잡고 북동 계절풍을 타고 인도로 내려갔다. 이후 겨울에는 남서계절풍을 타고 벵골만을 건넌 뒤에 다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이듬해 봄, 중국 남부에 도착한다.


일부 상인들은 중국보다 더 동쪽으로 진출하여 신라 울산까지 다다랐다. 신라의 금 세공품과 인삼은 서방의 상인들에게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한편 신라인들도 서방 상인들이 가져온 향료와 직물에 매료되었다.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에 나오는 처용이 이란 혹은 오만 사람이라는 주장은 아라비아와 신라의 교류도 제법 활발했음을 알려 준다.

 


상인들이 다시 반대 과정을 밟아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대략 2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태풍이나 해적의 위협도 존재했고, 조난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동방에서 건너 온 물건들에 대한 수요는 충분했고, 교역을 통해 얻는 수익은 항해 과정에서 생기는 위험을 커버하기 충분했다.


특히나 바다를 통한 교역은 육로를 통한 교역보다 더 많은 양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바다가 없는 북쪽은 강을 통한 교역이 활발했다. 북쪽에서 온 사람들은 볼가강을 타고 남쪽으로 와서 카스피해를 건넜다. 그 후 고르간에서 낙타로 갈아 타고 바그다드로 와서 모피, 호박, 꿀, 노예등을 팔고 비단이나 향신료 및 은화와 각종 공예품을 가져갔다. 그들이 가져간 공예품 중에는 인도에서 건너 온 불상도 있었다.


이들의 고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는데, 8세기 중반부터는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이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들은 서쪽으로는 잉글랜드, 남쪽으로는 시칠리아까지 다다랐고, 북서방향으로는 아이슬란드-그린란드를 넘어 북아메리카까지 도달했으며 동쪽으로는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방을 휘젓는다.


이들은 때로는 상인으로서, 때로는 정복자로서 활동했는데 아무래도 정복자로서의 모습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 더 많이 남아 있으니, 이들이 바로 바이킹이다.



이슬람 상인들의 교역로는 이베리아 반도까지도 연결 되었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한 것은 711년,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면서부터이다. 서고트를 멸망시킨 우마이야 왕조는 피레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공격했지만, 카를 마르텔에게 패해 물러났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하였고, 이 지역을 알 안달루스라 칭했다.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 온 이후 이베리아 지역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코르도바와 톨레도를 중심으로 직물업과 가죽 세공, 철강 산업이 부흥했다. 유대인들이 금융 분야를 맡아 경제를 활성화 시켰다.


아랍인들이 들여온 선진화 된 농경 기술로 전통적인 생산물인 포도와 올리브의 생산도 크게 늘었다. 그들은 이베리아에 쌀을 비롯하여 무화과, 대추야자, 사탕수수, 오렌지 등 새로운 작물도 들여왔다. 스페인 요리 빠에야는 이슬람 사람들의 작품인 셈이다.


이교도들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이베리아 민중들의 삶은 개선되었다. 민중에 대한 아랍인 지배자들의 통제는 이전 로마나 서고트 지배자들보다 느슨했다. 토지 이용이나 재산권을 사용하는데도 유연했고, 징세 부담도 이전 기독교 지배자들에 비해 크지 않았다. 민중들의 생활 수준은 전대에 비해 확실히 더 높아졌다.


이슬람 문명은 첫 번재 밀레니엄 시기 후반부,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를 연결시키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특히나 유럽은 이슬람 문명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로마 시절 무화적 유산과 동방의 선진 문물을 흡수 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사아시아 세계가 폐쇄적이고 낙후된 곳이며, 고리타분한 민족과 종교 문제로 인한 분쟁으로 시달리는 곳이라는 인상이 널리 퍼져 있지만, 천여년전 서아시아의 이슬람 문명은 개방적인 분위기에 활력이 넘치는 글로벌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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