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L 단편소설]
루시안
그림자 사나이
"당신이 보안관인가?" 강의 괴인이 말했다. 저지대의 먼지와 말라 시든 쇠뜨기 가시가 녹청색 얼룩을 형성하고, 그것이 또 호수 바닥에 켜켜이 쌓여 있던 진흙과 뒤범벅이 되어 온 얼굴을 덕지덕지 뒤덮고 있는지라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강의 괴인은 루시안의 개인용 객실 입구에 우뚝 서 있었다. 작은 것 같기도 하고 큰 것 같기도 한 몸뚱이에는 금가루가 묻은 누더기를 둘렀다. 프로그레스 외곽에서 사금을 몰래 채취하다 죽은 자에게서 벗겨낸 것이 분명했다.
강의 괴인은 숨을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루시안은 강의 괴인이란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강의 괴인은 수분이 없으면 말라 죽어버리기 때문에 자신들이 태어난 진흙 바닥 호수나 협곡의 개천에서 절대 멀리까지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강의 괴인이 사는 악취 나는 강물로 휴대용 물통을 채우려 하거나, 그 강바닥 모래진흙에 사금 채취용 냄비를 집어넣는 사람은 운이 지지리도 없는 것이다. 강의 괴인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마치 악어처럼 그자를 낚아챌 테니까. 널따랗고 진흙투성이인 팔을 내밀어 냄새 지독한 배설물 속으로 곧장 끌어들일 테니까. 한 순간에 자취가 사라지고 서부의 황야에 흔해 빠진 또 하나의 유령이 될 테니까.
"이젠 아니야." 루시안이 대꾸했다.
루시안은 강의 괴인을 바라보았고 강의 괴인은 그 시선을 되받았다. 루시안은 객실 창에 드리운 꽃무늬 커튼을 배경으로 온몸을 편안히 늘어뜨리고 있었다. 기차는 덜커덩거리며 질주했고, 흔들리는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조각조각 부서지며 강의 괴인의 어두컴컴한 눈을 비추었다. 말라서 쩍쩍 갈라지긴 했으나 얼굴을 온통 뒤덮은 진흙 아래에 거의 감춰지다시피 한, 생선을 연상케 하는 눈이었다.
"당신 배지가 필요한데." 강의 괴인이 말했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방 정부가 발급한 보안관 배지가 있으면 정부가 파견한 괴물 사냥꾼들을 피해 녹스 요새를 통과할 수 있다. 마차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 밴들 바로 남쪽에 강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늪지 숲으로 갈 수도 있다. 어쩌면 거기서 가게라도 낼 작정인지도 모르지. 요즘 들어 동부 해안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그쪽 저지대 사막 지역에 와서 정착하고 있으니까. 이자가 이렇게 절박한 도박을 감행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봐줄 수는 없는 일이지.
"너희 종족이 많이 안 남은 모양이군." 루시안이 말했다.
"모든 게 많이 안 남았어." 강의 괴인이 대꾸했다.
선로의 고르지 못한 부분을 기차가 지나가면서, 화물칸을 연결하는 용수철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죄어들었다. 그 순간 객실이 마구 흔들렸고, 강의 괴인은 양팔을 벌렸다.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진흙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바늘처럼 끝이 날카로운 이빨 수십 개가 드러났다. 양 어깨에서는 큼지막한 가시들이 솟구쳐 나왔다. 용수철들이 다시 한 번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기 직전, 총소리가 났다. 지옥의 불길 같은 가느다란 빛살이 기차 한쪽을 뚫고 나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태양 쪽으로 사라졌다. 강의 괴인이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루시안의 총은 총집 안에 다시 들어가 있었다.
섬광을 정통으로 맞은 강의 괴인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유황과 산사나무 타는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안쪽에서부터 불꽃이 일어나 지글지글 타오르면서 뒤틀렸다. 루시안은 모자를 고쳐 쓰고 객실에 깔린 어둠 속으로 다시 상체를 뉘였다. 그의 주변에서 어둠이 가볍게 몸을 떨더니, 미소를 지었다.
루시안을 살펴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수분이 말라버린 몸뚱이를 치우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루시안과 강의 괴인은 침묵 속에서 함께 여행을 계속했다. 객실 문은 계속 열려 있었다. 종점인 "천사의 안식처"에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죽은 이와 이야기하는 목사가 있는 곳에 닿을 때까지.
프로그레스 주민들은 이미 수군거리고 있었다. 지금 오는 법 집행관은 소문의 그 악마와 영혼을 잃은 사람들과 지독한 인연이 있으며, 뉴 에덴으로 가서 그 성스러운 목사를 만날 것이라고… 악마도 목사도 이곳 서부에서 불길한 징후로 통했기에, 그 누구도 그림자 사나이의 길을 막지 않을 것이었다. 주민들은 트윈 리즈나 레드리버 같은 사태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 마을들은 우연한 사태가 잔혹하게 꼬이고 뒤틀린 끝에 완전히 집어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주민들은 루시안이 조금이라도 빨리 자기들 마을에서 나가 주기를 바랄 테니, 루시안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줄 것이었다.
이번 일은 루시안이 연방 정부를 위해 일했던 때부터 문젯거리였다. 당시 정부는 루시안에게 그 악마를 잡아 문명세계로 끌고 오라는 임무를 맡겼다. 정부는 그 악마를 ‘법정에 세울’ 작정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려 했다. 서부 개척지대가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으니까.
물론 루시안은 악마가 하나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유일무이’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루시안은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모여든 낯선 존재들이 서부의 사막에서 활개치는 모습을 신물나게 보았다. 말끔하게 다림질한 양복을 걸친 악마들, 험한 바위 산 속에 몸을 숨긴 천사들, 마녀와 유령과 온갖 야수들이 저마다 달빛을 둘러 정체를 숨기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 순례자에게 달려들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서부 토박이 주민들과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생경한 무기, 해골 같은 머리통을 하고 살점을 먹어치우는 거인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계 인간… 이 모든 것들이 오래 전부터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악마들은,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이 악마는 달랐다. 이 악마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사신, 학살의 신, 고대의 간수, 그리고 거대한 뿔. 이 악마는 영혼을 수집했다. 적어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러했다. 그는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그 음산한 일을 계속했다. 산 자에게서 영혼을 빼앗고, 육체는 그 자리에 버렸다. 서부의 황야에서 태어난 존재이자 거친 개척 지대가 낳은 악마로, 다른 악마들과 마찬가지로 기대감 가득한 해맑은 얼굴을 한 채 끊임없이 서부로 밀려들어오는 개척자들을 상대로 끔찍한 굶주림을 만족시켰다. 마침내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다. 정착지를 넓히려는 연방 정부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 이후 세 명의 보안관이 그 악마의 손에 죽었다. 그 중 두 명은 루시안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쪽 주민들은 그놈을 쓰레쉬라고 부르더군." 정부 관리들이 말해주었다. "그자를 잡을 수 있겠나?"
루시안은 쓰레쉬를 그린 스케치를 훑어보았다. 놋쇠로 만든 소 머리통처럼 생긴 머리 주변을 일곱 지옥에서 타오르는 듯한 불꽃이 둘러싼 형상이었다. 줄을 달아 들고 있는 기묘한 랜턴이 쓰레쉬의 힘의 원천일 것이라고, 루시안은 판단했다. 만약 저 랜턴을 명중시켜 부술 수 있다면, 싸움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악마와의 싸움이 그렇게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특히 연방 정부가 파견한 사람들을 죽이는 악마의 경우에는 더더욱… 루시안은 추파로사 부근에서 특히나 고약한 악마와 얽혀들었던 일을 기억했다. 놈은 사막에 불어닥치는 폭풍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며 돌개바람을 일으켰다. 총알로는 도저히 명중시킬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동료가 때맞춰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그곳이 루시안의 무덤이 될 뻔했다. 이번 사냥에는 조력이 필요했다.
"혼자서는 어렵지." 루시안이 말했다. "세나가 있어야 해."
"이번 역은 종점인 '천사의 안식처'입니다." 차장이 말했다. 거의 속삭이듯 약한 목소리였다. 더운 날씨 탓에 강의 괴인은 이제 쪼글쪼글한 가죽 한 장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객실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속, 루시안의 자리에는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형체가 걸터앉아 있었다.
몸뚱이는 화염과 연기로 감싸였고, 이빨 같은 것이 돋아난 팔다리는 불꽃이 온통 이글거렸다. 무기는 시커먼 심연의 바닥에서 주조하여 악마 부대의 지휘관이 쓸 법한 생김새였다. 형체는 얼추 사람 같기는 했지만,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장작불의 불꽃과 재로 빚은 듯했다. 가슴팍에는 연방 정부 보안관임을 나타내는 상징이 뒤집힌 채, 달아오른 인장처럼 찍혀 있었다. 양 다리는 고대 느릅나무 첨탑이 소용돌이치는 불꽃에 휘감긴 듯한 형상이었다. 시뻘건 심장은 지상의 모든 분노를 담아 펄떡이는 것만 같았다.
"신이시여…" 차장이 말했다. 어떤 신을 들먹이는 것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것'은 기묘하게 생긴 멀쑥한 다리를 움직여 좌석에서 일어났다. 기차 안은 고요했다. 그 무시무시한 형체의 얼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끔찍스러운 희열을 느끼는 듯 입 주변이 부서지더니 그 틈새로 지옥의 불길이 새어나오며 조소하는 형상이 되었다.
바로 그 순간 재와 불꽃이 흩어져 버렸고, 객실의 어둠 속에서 루시안이 걸어나왔다.
"실례. 겁줄 생각은 아니었소."
차장은 루시안이 옆을 스쳐지나 객실의 금속 출입구로 내려가 황혼에 물든 저녁 공기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사람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천사의 안식처.' 문명 세계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신흥 도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공기에는 꿀과 포도주의 향이 가득했다. 도시 서쪽은 높직한 산자락의 기슭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소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개척지대 저 너머에서 그 무엇이 덮쳐오더라도 충분히 막아낼 만큼 총과 인원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천사의 안식처 주변에 살고 있는 생명체만으로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저 산을 넘어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사람은 정신이 완전히 나간 채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루시안은 북적대는 기차역을 나와 천사의 안식처 중심부로 가는 동안 동부 산업 지대에서 만든 인공 마법 연고인 뱀 기름을 파는 장사꾼 셋과 몸뚱이가 코브라인 술집 여인 한 명을 지나쳤다. 여인은 우유처럼 희부연 눈을 베일로 감추고 있었다. 안 그랬다가는 술집 손님과 나란히 앉아 술 한 잔 얻어 마시기도 전에 손님이 화강암 돌덩어리로 변해 버릴 테니까.
벌목꾼과 가스등을 켜는 점등원들, 잡화점과 사창가, 옛날에는 신이었으나 타락해 버렸다는 소문이 따라다니는 외톨이 총 제작자 너머, 중심가로 들어서기 직전에,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이 서 있었다. 들리는 바로는 이 도시가 개척지였을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다고도 하고, 심지어 그보다 더 전부터 장사를 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상호는 '세속의 왕'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야수든, 법망을 피해 달아날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여, 세속의 왕국은 그대들에게 열려 있나니… 물론 돈을 낼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 술집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잃을 만한 자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항상 보이지 않는 끈들이 자신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힘을, 어두운 그림자가 등 뒤에서 웃음을 머금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서부 오지에 자리잡은 정착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런 곳에 사는 주민들은 한 판 붙지 않고서는 귀중한 비밀을 털어놓는 법이 없다. 토착민들은 더더군다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상한 기계를 가지고 와서 법석을 떠는 정착민들까지도 참아 줬을 정도니…
루시안은 친구들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루시안의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라면 대개는 연방 정부 보안관들이겠지만, 그들은 악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든 싫든 간에 루시안은 곧 악마가 될 것이었다. 그러니 친구라는 개념을 훨씬 넓힐 필요가 있었다. 연방 정부와 계약하기 전, 성 자운의 자갈길 깔린 거리를 밟았던 때보다 더 전인, 돈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해치우던 자신만만한 풋내기 총잡이였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때 루시안은 많은 친구를 만났고, 그들은 손에 리볼버를 든 채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그 중 한 명만은 한결같았고 완강했다. 누군가에게 죽기에는 너무 컸고 그냥 죽기에는 너무 늙었다. 사실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오래 전 이 대륙에 처음 선박들이 닻을 내릴 때부터 싸워왔고, 모르긴 해도 모든 것이 먼지와 속삭임으로 화한 후에도 오랫동안 싸울 친구였다.
루시안은 '세속의 왕'의 널찍한 출입구로 들어섰다. 술집 안이 고요해지며, 온갖 몰골 사나운 손님들의 품평하는 눈길이 루시안에게 꽂혔다. 루시안은 약간 난처해졌다. "알리스타를 찾는데." 루시안의 말에 손님들은 즉시 시선을 거두고 카드 게임을 계속하거나 마시던 맥주에 관심을 돌렸다. 여기저기에서 다시 맥락 모를 폭소와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고, 음이 맞지 않는 피아노에서 나오는 새된 소리가 합세했다.
곧 루시안의 눈에 먼 구석에 앉아 있는 알리스타가 보였다. 아무리 세속의 왕 실내가 요란한 손님들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그 거대한 덩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알리스타는 덩치에 맞지 않게 되도록 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시건방진 젊은 총잡이들이 명성 좀 얻어볼까 하는 욕심에 모욕적인 언사로 싸움을 걸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그런 싸움이 젊은이들에게 좋게 끝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리스타는 미노타우로스였다. 키는 3미터가 넘고 어깨 너비도 2미터에 가까웠다. 그러니 누군가와 싸움이 붙으면 그 결과야 뻔했다.
"알리스타." 루시안이 말했다.
"보안관." 알리스타가 답했다.
"뉴 에덴으로 가려고 하는데 말야." 루시안이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절대 안 가는 곳이지." 알리스타가 대답했다. 루시안은 그 옆 의자에 앉았다.
알리스타도 이제 늙은 티가 났다. 하지만 몇 남지 않은 미노타우로스 중에서 알리스타가 가장 오래 살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낮 시간은 자기보다 약한 종족들의 아첨 어린 찬탄을 들으며 지냈고, 밤 시간은 자기 몸의 반밖에 안 되는 종족의 덩치에 맞게 만들어진 바 의자에 앉아 보냈다.
두 친구는 엄숙한 표정으로 앞쪽을 응시했다. 천사의 안식처로 오는 사람은 예외 없이 뭔가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너무나 절박한 사람만이 세속의 왕의 출입구에 들어선다. 세속의 왕은 변절자와 죽은 자들이 모여 술을 들이키는 소굴, 목적 없는 인생이 서서히 나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하수관, 황무지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자들이 마지막으로 멋들어진 총격전을 꿈꾸며 동전푼을 낭비하는, 그런 곳이었다.
루시안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북서쪽 깊숙한 지역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기찻길은 당연히 없고, 사악한 신들이 나무 사이를 누비는 곳이었다. 그는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소문을 추적하려는 것이었다.
둘 다 그에 따르는 위험은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특전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요청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뭐라고 할까?" 알리스타가 물었다. "네가 거기 간다고 하면 말이야."
"모르겠어." 루시안이 대답했다. "전혀 모르겠어."
알리스타는 마시던 술잔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두터운 맥주잔으로, 크기가 거의 어린아이 만했다. 알리스타는 기약 없는 작별 인사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지도를 그려줄게."
루시안은 '대머리수리 협곡'에서도 가장 지저분한 술집에서 피비린내나는 총격전을 벌이던 중에 총구 너머로 세나를 처음 만났다. 그 총은 세나의 총이었다. 대머리수리 협곡 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것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이번 총격전은 어떤 멍청한 현상금 사냥꾼이 어느 '외부인'이 등을 돌렸을 때 총을 뽑아들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전개되었다.
그 '외부인들'은 어디에도 있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말끔하게 양복을 빼 입었고, 도박을 미친 듯이 좋아해서 불량배들과 자포자기한 정착민들 사이에 악평이 자자했다. 이들에게 이기면 그야말로 비길 데 없는 부를 얻는 것을 의미했다. 일확천금을 벌 기회였고, 외부인은 밀랍 봉인—이것만으로도 상당한 값이 나갔다—으로 약속을 보증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지면 문제가 전혀 달라졌다. 외부인은 상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만을 판돈으로 받았다. 농장, 시계, 아이들, 영혼… 제일 좋아하는 단도까지. 상대는 미처 모르는 사이에 깊숙이 빠져 버리기 일쑤였다.
떠도는 소문에는 제레미아 제임스라는 백만장자도 이들과의 도박에서 졌다고 했다. 철도업계의 거물이자 거한인 남작으로, 루시안도 이전에 그가 의뢰하여 자잘한 일을 몇 가지 해결한 적이 있었다. 도박에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던 제레미아는 어리석게도 지극히 소중한 것을 담보물로 내놓았고, 도박에서 패하자 두 번 파산하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
그리고 총잡이라면 거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온갖 비열하고 비겁한 술수가 판치는 대머리수리 협곡 시의 수배 게시판에 현상금을 준다는 종이가 나붙고 그것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도시 노동자들의 구역으로 흘러들어가면, 현상금 사냥꾼들이 꼬여든다. 그런 작자들은 돈과 폭력 외에 다른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사냥꾼은 별 경고도 없이 총을 빼들었다. 술집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외부인은 아무 흥미도 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무장한 악당과 살인자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세나와, 몇 안 되는 보안관들과, 알리스타가 있었다. 모두들 누군가가 행동을 개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친구." 사냥꾼이 속삭였다. 사탕처럼 달콤하지만 피냄새가 풍기는 목소리였다. "내가 찾는 걸 당신이 갖고 있다는 거 다 알아. 그걸 나한테 넘겨. 그럼 모두들 여기 들어왔을 때처럼 평온하게 여길 나갈 수 있을 거야."
외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얼굴은 도자기 인형처럼 차분했고 6연발 쌍권총을 든 사냥꾼의 위협에도 근육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사냥꾼이 온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저물어가는 태양이 내뿜는 열기와 이 세계의 가장자리 끝에서 퍼마신 술 때문에, 누가 진짜로 싸움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지, 누가 그저 허풍을 떠는 것뿐인지를 가려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술집을 가득 메운 침묵을, 사냥꾼은 총 한 방으로 깼다. 그녀의 권총에서 대형 탄환이 발사되어 외부인의 몸 한복판을 파고들었다. 외부인의 몸뚱이에서 연기구름이 피어올랐고, 구멍에서는 새까만 연기가 까마귀 모양으로 번져나오더니 그 연기 속에서 커다랗고 사악하게 생긴 까마귀 한 마리가 튀어나와 포커판이 벌어진 탁자로 뛰어들었다. 사냥꾼은 마구 총을 쏘아댔고, 카드와 칩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루시안은 사냥꾼을 겨누었고, 보안관들은 루시안을 겨누었고, 알리스타는 그 짧은 시간에 되도록 큰 몫을 챙기려고 돌격해 들어갔다. 술집 안의 모든 총구가 불을 뿜었다. 총알이 사냥꾼과 보안관 한 명을 뚫고 지나가는 순간, 루시안은 당구대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거기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곤경에 처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세나가 말했다. 그녀의 총구는 루시안의 이마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눈은 온화한 대초원의 빛깔이었고, 중간중간에 검은색 반점이 떠 있었다. 루시안은 장전된 총을 겨눈 상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뻔했다.
"안녕하세요." 루시안이 대답했다.
"이 강직한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을 택하신 모양이죠?" 세나가 물었다. 그때 술집 주인의 몸뚱이가 힘을 잃고 두 사람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검은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올랐다.
"다는 아니고, 일부죠." 루시안이 대답했다.
순간 세나는 몸을 숙였다. 대형 총알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당구대 한쪽이 떨어져나갔다. 세나의 동작이 어찌나 빨랐는지 루시안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사람이 총알을 피하는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신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지만, 세나는 자신감이라면 흘러넘치고도 남았다.
세나는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배지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수석 보안관의 별 모양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총을 뽑는 사람 중 한 명임을 입증하는 표식이기도 했다.
"그럼, 일단은…" 세나는 싱긋 웃더니,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루시안의 권총을 압수했다. "걱정 말아요. 나중에 돌려줄 테니… 이 소동이 끝난 후에도 당신이 죽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엄폐 사격으로 재빨리 두 발을 쏘면서 다시 눈앞의 총격전에 뛰어들었다. 루시안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 뒤의 총격전은 흐지부지해졌다. 어느 순간엔가 현상금 사냥꾼이 연기에 휩싸인 외부인의 몸뚱이에서 기름에 흠뻑 젖은 정체불명의 물체를 낚아채 술집 출입구로 달려나갔다. 외부인은 고함을 지르며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술집 손님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누구도 총을 쏘지 않게 되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른 술집에서 술을 마시려고 나가버렸다. 대머리수리 협곡 시에서 술과 시체는 절대 공급이 부족해지지 않는 두 가지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보안관들은 바로 그때부터 루시안이 청부 총잡이 일을 때려치우고 연방 정부를 위해 괴물을 사냥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하곤 한다.
물론 루시안의 마음은 야수들에게서 사람들을 구해내기보다는 미소를 지으며 총알을 피하는 미녀에게 가 있었다는 사족도 잊지 않는다.
알리스타의 지도는 엉성하기는 했지만 꽤 유용했다. 지도에 그려진 대로 천사의 안식처에서 북쪽으로 하염없이 걷다 보니—백 년 정도 걸린 느낌이었다—, 그 어떤 살아 있는 사람도 감히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법한 풍경이 나타났다. 사물의 색감은 훨씬 선명해 보였고, 공기 자체가 기이한 마법을 발산하고 있었다. 루시안이 잠을 청하면, 그의 시야 바로 바깥에서 거대한 생명체들이 도사리고 앉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해가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면 천막을 쳤고,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그림자는 밤에 가장 강해졌다.
루시안은 그 사악한 그림자가 자신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을, 자신을 몸 밖으로 끄집어 내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얼마 안 가 피부가 가려워지더니 박편이 되어 떨어져나갔다. 입이 비틀리면서 굶주린 활짝 웃음 모양이 되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고, 악마가 루시안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지옥의 화염 바다에서 서부 지대에 자라나는 쪽빛 덤불들이 솟아올랐고, 그 타닥거리며 불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익사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분노가 느껴졌다. 무시무시하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분노, 수치심, 역겨움. 루시안 자신의 영혼 어두운 곳에서부터 태어난 혐오스러운 증오. 그때서야 비로소 전투는 시작될 것이다. 악마는 루시안의 육신을 취하려 하고, 그에게 남은 자아는 그것을 되찾으려고 허우적거릴 바로 그때.
얼마 전부터 악마로의 변신이 루시안이 감내할 수 있는 시간보다 더 길게 지속되기 시작했다.
문득 살갗에 따끔거리는 느낌이 강해지더니,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쩍쩍 금이 갔다. 루시안은 쓰러진 통나무에 최대한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온몸의 근육이 얼어붙었다. 변화와 사투에 대비하여, 그리고 아침이 주는 약속을 기다리며.
루시안의 눈이 흐려졌다. 하늘이 비틀리더니 진홍색으로 물들어 갔다. 마치 일몰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만 같았다. 어느덧 화염이 하늘을 에워쌌고,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짙은 안개가 덮쳤다. 주변에 우뚝우뚝 선 나무들이 마치 섬뜩한 토템처럼 보였다. 루시안이 피운 장작불만이 이 세계를, 군데군데 초목이 자리한 평원의 초록색과 갈색을 비추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변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은 확실했다.
울창한 숲 저편에서 기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공허하고 뒤틀렸으며 어두운 목구멍을 떡 벌린 듯한 소리였다. 악마가 퍼뜨려 놓은 듯한 암갈색 안개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소리였다. 이것은 겪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루시안이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 휘말려 있는 참이라 돌아볼 수도, 총을 뽑을 수도 없었다. 루사인이 몸을 일으켜 보려고 기를 쓰는데, 두툼한 금속 다리 여러 개가 태곳적부터 빽빽이 자라 있던 나무들을 장난감처럼 가볍게 부수며 다가왔다. 그 다리가 어색한 동작으로 이끌고 오는 것은 거인의 상체였다. 루시안은 움직일 수도, 그 괴상한 존재에게서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거인의 상체 중심부는 뻘겋게 달아오른 석탄 더미였고, 주변에는 피부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둥글넓적한 기관차 밸브들이 오래 전 죽어버린 거인의 어깨를 떠받친 채 연기를 뿜어냈다.
악마다. 루시안은 생각했다. 악마가 또 하나 있었어.
거대한 괴물은 루시안 앞까지 다가왔지만 안개 때문에 전체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괴물이 육중한 금속 다리를 구부리자 상체가 앞으로 쏠리며 얼굴이 장작불빛 속에 드러났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루시안." 괴물이 입을 열었다.
루시안은 즉각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오래 전에 행방불명되었거나 죽었을 거라고 여겨졌던, 외부인과의 도박에서 자신의 심장을 판돈으로 내걸었던 바로 그 백만장자였다.
"제레미아?"
한때 백만장자 기업가였던 괴물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 흉측스러울 정도로 기형적인 형체는 제레미아라는 인간성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히 보여주었다. 버려진 화물 기차 십여 량의 녹슨 골조로 뼈대를 삼고, 지옥의 화염으로 작동하는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괴물일 뿐이었다. 악마의 용광로가 내뿜는 열기에 배는 터질 듯이 불룩했다. 루시안과 괴물 사이에 타오르는 장작의 불길이 괴물 쪽으로 끌려가듯 쏠렸다. 마치 제레미아가 그 불길을 들숨으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 이름은 떨쳐버린 지 꽤 됐어, 친애하는 보안관 나으리." 괴물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주변의 땅으로 스며드는 동안, 루시안은 온몸이 굳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젠 우르곳이라 불러주실까. 그게 내가 택한 이름이거든."
"궁금해하는 거 다 알아." 우르곳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절망적인 땅을 문명화하려던 노력을 그만 뒀어. 위대한 강철 제국을 세우겠다는 내 계획도 버렸고 말이야. 난 자만심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던 거지. 나는 거래를 받아들였고… 당신이 그랬듯이 말이야. 그리고 그 대가를 너무나 비싸게 치렀지."
거대한 괴물은 오래 전 자기 심장이 자리하고 있었을 부위, 지금은 달아올라 백열을 내뿜는 석탄더미가 박혀 있는 부분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소문이 맞았군. 제레미아는 오래 전에 죽었던 거야.
"그건 죽음이 아니었어." 마치 공중에서 루시안의 생각을 낚아채기라도 한 듯, 괴물이 말했다. "비록 내 소중한 소유물을 돌려받았을 즈음에는 나를 살아 있다고 부르기엔 너무 늦었지만. 내 뭄뚱이는 사막 가장자리에 버려졌어. 그… 동료들이… 그랬지. 배반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된 자들이 말이야.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여긴 악마가 아주 많아… 당신이 죽이지 못했던 그 괴물과는 달리, 나는 어떤 악마에게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지."
우르곳과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장작의 불길은 끊임없이 위로 솟아올라 우르곳의 뱃속으로 쏟아져들어갔다. 우르곳의 몸뚱이 안쪽 어디에선가 굶주린 기어 수백 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루시안은 걸신 들린 거대한 목구멍이 하늘을 잡아채어 우걱우걱 집어삼키는 장면을 상상했다.
"난 당신이 자신과의 결투에서 패할 거라는 걸 알아, 보안관. 내가 그랬거든. 난 도박에서 진 후에 시시한 강도 나부랭이가 될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슬픈 필멸의 존재답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구렁텅이로 빠져들었지. 당신도 나와 같은 길을 따라간다면—틀림없이 그렇게 되겠지만—, 조만간 난 당신이라는 껍데기를 걸친 괴물과 만나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거대한 금속 다리들이 펴지자 우르곳의 얼굴이 멀어져갔다. 이글거리는 열기와 불꽃을 내뿜던 지옥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늘이 찌그러지더니 금이 가면서 부서졌다. 매서운 빛살을 내쏘던 태양이 다시 한 번 싸늘하고 빛 한 줄기 없는 한밤중으로 바뀌었다. 루시안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곧 그림자가 그를 부를 것이었다.
신속하게 행동해야 했다.
당시 루시안은 경솔했다.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악마가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와 세나는 말을 몰아 극지 산악 지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단 한 방으로 쓰레쉬를 잡겠다는 투지가 넘쳐 흘렀다. 루시안은 역대 가장 뛰어난 보안관 중 한 명이었고, 세나는 역대 가장 뛰어난 보안관이었다. 두 사람은 용감하고, 무모했으며, 서로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쓰레쉬는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쓰레쉬라고 불리는 그 악마는 고지대 개척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괴물과는 달랐다. 게걸스러웠고 잔혹했으며, 사람들이 이 대륙의 동쪽 해안에 상륙하고 서부에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영겁 이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다.
신들을 탄생시켰던 우주의 존재들도 차츰 나이가 들고 죽어갔으며, 그들의 태고의 육신은 지상으로 떨어져 산과 계곡과 원시 바다를 만들었다. 하지만 쓰레쉬는 계속 살아 있었다. 파괴를 갈망하는 끝간 데 모를 게걸스러움 덕분에 비정상적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게 이름을 붙여줄 만큼 발달한 언어가 생기기도 전부터 이 대륙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야수의 해골을 닮은 머리는 혐오스러운 불길에 휩싸여 있고, 악의가 가득한 시선은 상대를 빤히 응시했다. 그 오래된 육신에 깃든 적의는 그 무엇으로도 정화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쓰레쉬는 자신보다 먼저 죽어간 존재들의 뼈와 살을 짓밟고 돌아다니며, 그 슬프고도 잊혀진 자손들의 영혼을 탐닉했다.
루시안은 칼날처럼 예리한 채찍이 한쪽 어깨를 곧장 파고들 때까지도 상대를 보지 못했다. 채찍은 그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총을 쏘는 쪽 팔을 못 쓰게 만들어 버렸다. 세나는 연인이 떨어뜨린 총을 잡으려 뛰어들었으나, 그녀 역시 악마의 힘에 당하고 말았다. 땅바닥에서 화염이 벽처럼 솟구쳐 오르더니, 음산한 웃음이 들려왔다. 창백하고, 눈이라고는 구멍 두 개뿐인 쓰레쉬의 머리통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쓰레쉬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태고의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심연처럼 깊은 목소리였다. 루시안은 그 야수가 세나에게 칼을 꽂는 것을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목격했다. 전투는 고작 몇 초만에 끝났다. 사실 쓰레쉬는 시작하기 전부터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악마는 땅에 쓰러진 세나를 굽어보고 섰다. 공기는 살을 에듯 차가웠으나, 쓰레쉬의 몸 안쪽에서는 화염이 구불구불 피어올랐다. 쓰레쉬는 돛처럼 부풀어 오른 누더기 코트 안쪽에서 날이 깔쭉깔쭉한 칼을 꺼내들었다. 루시안은 쓰레쉬의 소굴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십여 군데 마을에서 쓸쓸하게 버려진 시체를 여러 번 보았다. 또한 쓰레쉬와 마주친 불운한 마차들에서도 그런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래서 쓰레쉬에게 붙잡혔을 때의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리고 늘 그 각오를 되새겼다. 하지만 어리석은 풋내기 보안관이 맞이해 마땅한 운명에 세나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사악한 살육의 축제를 벌였던 쓰레쉬가 순간적으로 재미있겠다는 기분이 들어 루시안에게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은.
그거야 간단한 일이지. 루시안은 생각했다. 너무 확실해서 1초도 주저할 것이 없었다.
세나 대신에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겠다는 제안이었으니까.
그러자 그림자가 루시안의 육신을 장악했다. 그의 몸 안에서 증오와 수치심이 들끓어 올랐고, 그의 오감을 점령했다. 세나의 애원하는 두 눈 앞에서, 루시안의 육신은 타락해 버렸다. 거래는 끝났고, 봉인은 찍혔다. 그리고 루시안의 시야가 화염으로 가득 찰 무렵, 그는 자신이 사냥하기로 했던 악마가 세나의 무력한 육신으로 몸을 숙이는 것을 보았다. 놈은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뜨리며, 기어코 세나의 심장을 가져갔다.
뉴 에덴의 신성한 목사의 정체나 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힘이 서부를 넘어 동부 지역까지도 퍼져나갔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부 주민들은 그 목사가 죽은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소문을 즐겨 퍼뜨렸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북서쪽의 미개척 지대로 떠난 순례 행렬 중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물며 뉴 에덴으로 향했던 사람 중에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부근의 언덕에서 뉴 에덴을 내려다보고 있는 루시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뉴 에덴은 교회를 둘러싼 소규모 공동체였지만 악천후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숲에 사는 야수들의 습격도 받지 않았다. 자그마하지만 번창 일로에 있었다. 공동체 주변의 밭은 작물이 풍성했고 예스러운 분위기의 건물들은 생기가 흘렀다. 흙먼지가 날리는 도로를 아이들은 뛰어다녔고 장사꾼과 주민들은 평온하게 걸어다녔다. 악마, 외부인, 마녀, 거인은 물론이고 오래 전부터 서부의 황야에서 활개치는 강도떼의 기계 무기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맑고 깨끗한 장소였다. 루시안은 잠시, 자신은 이미 악마와의 결투에서 져 버렸고 눈앞의 이 광경은 악마가 위로 삼아 보여주는 보상인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는 언덕을 내려갔다. 뉴 에덴 주민들은 불쑥 나타난 낯선 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신성한 목사님을 만나러 오셨나요?" 해말간 얼굴의 젊은이가 물었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낯선 이여, 할렐루야!" 젊은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주 정확히 찾아오신 겁니다."
루시안이 기억하는 그 어떤 마을이나 도시의 모습도 뉴 에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빵집을 지나자 갓 구운 빵의 향기가 그의 콧속을 가득 채웠다. 거리 곳곳에서 젊은 여성들이 춤을 추었고 악사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예배당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서부에 만연한 폭력과 광기는 단 한 순간도 끼어든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루시안이 길을 걷는 동안 주민들은 인사를 건네고, 갖고 있는 음식이나 물을 권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 중인지를 물었다.
루시안의 내면에 있던 악마가 격렬하게 날뛰었다. 하지만 이렇게 밝은 대낮에는 악마를 눌러버리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뉴 에덴에는 무언가 루시안을 차분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여기선 아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루시안이 돌아보니 다정한 느낌의 노인이 서 있었다. 목사들이 입는 검소한 프록코트 차림이었다. 나이 때문에 눈색은 바랬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생기가 반짝였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건 삶을 두려워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불확실성에서 나오는 올가미 같은 유혹을 모르는 삶을 살 수 있답니다."
루시안은 노인이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노래하듯 경쾌한 억양이었다.
"그걸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루시안이 대답했다.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노인은 무심히 걷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그를 따라갔다.
"우리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땅에 살고 있지요. 그들은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좋든 나쁘든 말이지요. 그들이 재앙을 일으키는 것도 볼 수 있어요. 이 세계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우리의 신들 중 다수는 아직 살아 있어요. 그리고 그들의 자손인 우리를 지금도 굽어보고 있는 거지요."
노인은 마을 중앙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하얀 벽과 파란 지붕이 마치 그림처럼 보이는 교회가 하나 서 있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스테인드 글라스 창도 어찌나 광나게 닦여 있는지 반짝반짝거렸다. 어른들은 교회를 들락날락하며 웃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그 다리 사이를 누비며 뛰어다녔다. 건물은 마치 어제 지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신들은 믿는 자에게 많은 선물을 내려줍니다. 삶이라는 선물, 사랑이라는 선물이죠."
노인이 몸을 돌려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다 안다는 듯한 미소가 그 얼굴에 떠올랐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선물도."
무언가 기묘하다는 느낌이 루시안의 귓전을 울렸다. 그건 노인이 죽음을 말하는 방식이었다. 그 소리가 노인의 입술에서 만들어지는 방식이었다. 마치 연인에게 비밀을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나가던 주민들도 순간 입을 다물면서 마치 꿈을 꾸듯 눈을 감더니, 그 기묘한 선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눈을 떴다.
"안에 들어가 있을 테니, 마음이 내키시면 언제라도 들어오세요." 노인이 말했다. "참, 사람들은 나를 카서스 목사라고 부르지요. 당신에게 보여줄 게 아주 많군요."
교회 내부도 역시 말끔하고 온통 흰색이었다. 신도들이 앉은 의자도 광이 났지만, 설교단은 검소했다. 카서스는 안에 있던 신도들에게 손을 내저어 밖으로 내보냈다. 신도들은 밖으로 나가며 루시안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곁을 지나갈 때 "환영합니다."라고 속삭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양 손바닥을 부딪혀 차분히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루시안에게, 뉴 에덴은 문 밖의 세계에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 작은 마을이 평온한 것이야말로 저 카서스라는 목사가 어떤 종류든 무언가 힘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루시안의 내면 깊숙한 안쪽에서, 그림자가 격분했다. 또다시 살갗 아래쪽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영혼 어두운 구석에서 불꽃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입술이 뒤틀리며 상대를 조롱하는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지금 그림자는 겁을 먹고 있었다. 루시안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이런." 카서스가 말했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지금은 그러면 안 되겠지요."
목사는 조그만 책을 집어들었다. 검은 표지에 황금색 열쇠 문양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목사가 부드럽게 손을 저으며 뭐라고 몇 마디 중얼거리자마자, 악마는 급작스럽게 조용해졌다. 하지만 루시안은 느꼈다. 악마는 조용해지기 직전, 그 짧은 찰나에 루시안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꺼져가는 장작불이 내는, 낮게 타닥거리는 소리로.
"저들이 괴물이다."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땅에서, 당신은 무엇이 될지 궁금해지는군요." 카서스가 빛 바랜 사제용 천을 어깨에 두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루시안에게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손짓했다. 루시안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그 자신도 놀랄 일이었다.
"왜 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요?"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사방의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뉴 에덴을 가득 채우던 발랄한 음악 소리는 서서히 비틀리면서 기이하고 구슬픈 가락이 되어갔다. 카서스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목사의 미소는 더욱 커졌다. 루시안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뒤쪽 마루널에서 뭔가가 잽싸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안이 너무나 잘 아는 소리였다.
"우리는 자신을 두려움에 너무 많이 내줍니다." 카서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 깊어지고 더 어두워졌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대부분을 내주었군요."
늙은 목사의 주변에 에너지가 소용돌이쳤다. 그 안에서 빛을 내는 파란색과 초록색 형상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더니 루시안이 잃었던 친구들과 루시안이 죽였던 것들을 닮아갔다. 그 형상들은 교회 서까래를 배경으로 춤을 추었다. 교회는 이제 다 쓰러져 가는 건물로 변했다. 하얀 칠이 벗겨지면서 시커멓게 썩어가는 벽이 드러났다.
루시안은 등 뒤에 적어도 열 개가 넘는 형체가 있음을 감지했다. 어떤 것은 네 발로 기었고, 또 어떤 것은 뒤틀리고 부서진 신도석에 올라갔으며, 또 어떤 것들은 아직 교회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인간인 척했던 외양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루시안은 이제야 깨달았다. 왜 이 마을은 온전했는지, 왜 주민들은 그토록 착하고 친절했는지.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전에는 인간이었으나 아주 오래 전에 죽었다고 해야 옳을까.
루시안은 양손을 조금씩 권총 쪽으로 움직였다.
목사는 이제 키가 엄청나게 커져서 루시안을 굽어보고 있었다. 황금 열쇠를 새긴 책을 단단히 붙든 채, 목소리가 겹쳐져 광적인 합창처럼 들리는 설교를 사방이 쩌렁쩌렁하도록 늘어놓고 있었다. "우리의 혼은 죽음의 서늘한 물 속에서 정화되리라! 우리의 망가진 영은 제 모습을 찾으리라! 우리가 잃었던 것들은 되돌아오리라!"
루시안의 뒤쪽에서, 괴물들이 굶주림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앞으로 기어나왔다. 카서스는 양팔을 활짝 벌리고 퀴퀴한 냄새 가득한 공기 중으로 몸을 더 높게 띄워올렸다. 그 주변을 루시안의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빙글빙글 돌며 되풀이되었다. 남자와 여자들이 죽고 죽고 또 죽었다.
문득 친숙한 목소리가 루시안의 귓전을 스쳐지나갔다. 어떤 단어를 말한 듯했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카서스가 물었다.
루시안은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타닥타닥거리는 서사시, 장작불의 잿더미, 성냥이 마찰하는 소리였다. 세나의 죽음을 이야기했고, 루시안이 얼마나 큰 절망에 빠졌는지를 이야기했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 버린 보안관은 몇 년 동안이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이름 말고는 모든 것이 죽어버렸고,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하루 이틀 날이 갈수록, 처음에는 조그마했던 잔혹한 그림자가 그의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루시안의 내면에서 마구잡이로 자라났고, 내면의 어둠은 루시안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날뛰었다. 이 고투를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제아무리 위험하거나 어리석은 방안이라도 시도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시안은 죽은 이와 이야기할 수 있다는 남자에 대해 들었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루시안은 이미 자신의 끔찍스러운 증오를 형상화한 그림자에게 자신을 내주었고, 그 그림자가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용납한 터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루시안은 교회에서도 뉴 에덴의 거리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악마와 단 둘이,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달빛이 비추고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이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루시안의 살갗에 닿았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 마을이 있는지 점점이 불빛이 보였고, 달은 하늘에 낮게 걸려 있었다. 악마가 발을 디딘 땅의 꽃들은 화염에 휩싸여 타버렸지만, 정작 악마는 차분하게 서 있었다. 얼굴에는 낯익은, 탐욕스럽게 일그러진 웃음을 띠고 있었다.
루시안은 공기를 들이켜 보았다. 그는 자신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그림자에게 내주었다. 쓰레쉬에게, 그리고 가차 없는 서부에게도… 하지만 루시안은 아직 자신의 영혼은 놓지 않았다. 비록 반쯤 타락하긴 했어도, 그리고 그림자가 그 일부이기는 했어도.
그림자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한 발을 디딜 때마다 꽃들이 더 많이 타들어갔다.
루시안은 한 손을 내밀었고, 그림자는 시커멓게 탄 한 손을 그 위에 얹었다. 그림자가 속삭였다. "너의 적들을 불 속으로 던지겠는가?"
루시안은 침묵을 지켰다. 그림자가 닿은 손의 살갗이 치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그림자는 다시 속삭였다. 이번에는 루시안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 잿빛 몸뚱이가 루시안의 육신과 연결되어 있을 때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함께 할 것이다."
"그대가 잃은 사랑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카서스가 노래했다.
루시안은 권총을 빼들었다. "아니."
루시안의 한 팔이 길게 늘어나면서 내면에 잠들어 있던 악마의 총과 하나가 되었다. 불경스러운 화염 한 줄기가 카서스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혔다. 목사가 쓰러지자, 루시안은 몸을 휙 돌려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그때 부서진 신도석 어딘가에서 악귀 하나가 괴성과 함께 그에게 달려들었다. 루시안은 다시 총을 쏘아 악귀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고, 쪼글쪼글 오그라든 채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다른 악귀들, 악사, 제빵사, 춤추는 여자, 농부들이었으나 이제는 뒤틀리고 텅 비어버린 형체들에 세 번째로 총탄을 발사했다. 총탄은 악귀들 한가운데에서 폭발했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자 다 쓰러져가는 교회의 문과 창문, 출입구에 공포가 홍수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뉴 에덴이 루시안을 맞으러 일어섰다.
루시안의 몸을 그림자가 잠식했다. 공포의 화염이 격류가 되어 괴물들을 집어삼키자 그림자는 양팔을 번쩍 쳐들었다. 악마는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고, 그 목소리는 루시안 자신의 목소리와 섞여들었다. 지옥의 불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와중에 악마는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교회 천장의 나무판자가 불이 붙은 채 떨어져내렸고, 마구 쏘아대는 총탄은 무너지기 직전인 교회 벽을 뚫고 나가 뉴 에덴의 거리로 퍼져나갔다. 마을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악귀들은 공포에 찬 괴성을 지르며 마을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악마는 그들보다 빨랐다. 폭삭 주저앉은 교회에서 빠져나온 악마는 엉망이 된 거리를 누비며 떡 벌린 악귀들의 입을 향해 지옥의 총탄을 닥치는 대로 발사했다.
그때, 루시안은 악마의 몸을 뚫고 뛰쳐나왔다. 악마의 몸뚱이는 잿빛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언데드 악귀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동안, 루시안은 두 권총을 하나로 모아 잡았다. 총의 금속에 깃든 인공 마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정교한 선 세공 문양이 바깥쪽으로 소용돌이치면서 두 총구가 굶주린 듯 하나로 합쳐졌다. 그 안쪽 어딘가에서 한 줄기로 모인 빛의 섬광이 뿜어져나왔다. 섬광은 평원을 사정없이 갈랐고, 괴성을 지르며 도망가던 악귀들은 그 광포한 불꽃 아래 말 그대로 녹아버렸다.
얼마 안가 섬광은 희미해졌다. 루시안이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는 동안 총은 저절로 다시 분리되었다.
루시안은 기다렸다. 그의 내면에 있는 그림자는 이제 조용했다. 불타오르는 낡은 건물에서, 아니면 썩어버린 작물 틈바구니에서 뛰쳐나오는 악귀도 더 이상 없었다. 카서스의 시신은 교회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 그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가 무시무시한 마법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기억조차 거센 불길에 자취도 없이 타 버릴 것이다. 하지만 루시안은 곁눈으로나마 똑똑히 보았다. 불타는 교회 지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 그 밑에서 뉴 에덴 주민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나이 든 목사의 얼굴을.
이윽고 전직 보안관은 몸을 돌려 문명세계 쪽으로 향했다. 그가 걷기 시작했을 때, 씨익 웃는 그림자가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루시안은 세나와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뻔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이제 더 이상 오래된 의식과 주문이 가져다주는 위안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세나를 다시 만날 기회가 올 것이었다. 죽어서 땅에 묻히면 되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정 용맹한 총잡이가 마땅히 맞이할 결말이었다. 그때가 오기까지는,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끔찍한 일이 무수히 많고, 그건 곧 그 악마가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의미다.
저 드넓은 개척지대의 광대한 땅 어딘가에, 루시안이 처치해야 할 악마가 아직 살아 있다.
출처 : 리그 오브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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