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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NG/LOL

[LOL 단편소설] 야스오, 리븐 - 부러진 검날의 고백 [2]

by Captain Jack 2018. 11. 15.

 

[LOL 단편소설]

야스오, 리븐


부러진 검날의 고백 [2]


 



- II -

치안판사들이 공회당에 들어오면서부터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군데군데 갈라졌다. 공회당 뒤편의 커다란 문들이 다시 열렸다. 리븐의 눈에, 공회당 안으로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을 피해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이리저리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리븐이 공회당 문턱을 넘어 걸어들어가자,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공회당 안 대기가 부산스러워졌다.


리븐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두 명의 전투 사제가 군중 앞쪽의 널찍한 통로로 리븐을 데리고 갔다. 구름이 다시 하늘을 덮었고, 천정 높이 뚫린 소용돌이 모양의 창과 조각으로 뒤덮인 지붕에서 늘어뜨린 원통형 랜턴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공회당은 다시 한 번 어두컴컴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리븐이 곁을 지나가자, 샤바 콘테는 침을 꿀꺽 삼켰다.


리븐은 군중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잘 알고 있었다. 돌로 만든 감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느라 흰색 머리칼에 지푸라기가 군데군데 붙은 여자. 이방인. 적. 녹서스의 딸.


피로감이 지금도 옷에 들러붙어 있는 밭의 진흙처럼 온몸에 덕지덕지 스며들었다. 마음은 허물어져 있었으나, 아사 노인이 걸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리븐은 상체를 조금 세웠다.


리븐 앞 연단에는 세 명의 판사가 앉아 있었다. 중간에 앉은 근엄한 표정의 판사가 쇠고랑을 차고 서 있는 리븐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리븐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나무 의자에 앉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옆에 선 집행관이 자신을 잡으러 밭으로 왔던 기수들의 우두머리임을 알아챘다. 집행관의 얇은 입술에는 그때와 똑같이 오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좋을 대로 해. 그래봤자 더 힘들기만 할 테니.”


집행관은 자못 흡족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중앙의 판사는 책망하는 표정으로 집행관을 흘긋 보고는 리븐에게 말했다.


“너는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이곳의 방언은 까다로우니, 이제부터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공용어로 말하겠다.”


녹서스인이 대개 그랬듯이, 리븐도 명령과 지휘에 필요한 정도로는 아이오니아 공용어를 배웠다. 하지만 아이오니아의 대지가 지역마다 다르듯이, 아이오니아의 각 마을은 주민들이 선호하는 바에 따라 억양이 다양하고 독특했다. 리븐은 판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기다렸다.


“이름이 무엇인가?”


“리븐.”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쉰 데다가 목에 무엇이 걸린 듯 꺽꺽 소리가 섞여나왔다.


“물을 가져다 주게.”


판사의 말에 집행관이 일어나 물이 든 가죽 자루를 가져오더니 리븐에게 불쑥 내밀었다. 리븐은 물 자루를 받지 않았다.


“그냥 물이다.” 중앙의 판사 옆쪽에 앉은 판사가 탁자 너머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왜, 우리가 너에게 독이라도 먹일까봐 두려운 거냐?”


리븐은 고개를 저었지만 자루는 받지 않았다.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을 뿐 도움은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집행관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는 자루를 자기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가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집행관은 이를 번들거리며 리븐에게 여봐란듯이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네가 이 공회당으로 불려온 것은…” 판사가 말하는 바람에 리븐은 법복을 걸친 세 판사와 공회당을 가득 메운 주민들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네가 어떤 할 이야기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이다.”


“형을 선고받는 것 아닙니까?”


판사는 놀란 표정을 얼른 숨겼다.


“네가 온 곳에서는 정의를 어떻게 실현하는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는 정의를 위해서는 먼저 납득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판사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리븐에게 말했다. “우리는 네가 이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지식이 범죄임이 밝혀진다면, 그에 따라 너에게 형을 선고하고 처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리븐은 판사에게서 눈길을 돌려 아사를 바라보다가 다시 판사를 보았다. 녹서스에서 정의란 대개 전투로 결정되었다. 순식간에 죽게 된다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리븐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판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판사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리븐, 너는 어디 출신인가?”


“나는 고향이 없습니다.”


판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리븐의 말을 반항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매를 연상케 하는 얼굴의 판사는 울화를 삭히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태어난 장소가 있을 것이 아니냐.”


“트레베일의 어느 농장입니다.” 리븐은 아사를 한 번 돌아보고 덧붙였다. “녹서스요.”


죄수의 말을 들으려고 쥐죽은 듯 조용하던 공회당 주민들은 일제히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렇군.” 판사가 말했다. “그런데 너는 그곳을 더 이상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 거냐?”


“고향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면 거긴 고향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추방을 당했다는 거냐?”


“돌아갈 마음이 있다면 그렇겠지요.”


“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것이냐?”


“녹서스는 이제 과거의 녹서스가 아닙니다.” 리븐의 목소리에 조바심이 스몄다. “이 문제는 이제 넘어가죠?”


“그렇게 하지.” 리븐은 판사의 냉정한 태도가 거슬렸다. 손목의 쇠고랑보다 더 마음을 자극했다. “너는 녹서스 함대와 같이 온 거겠지?”


“그럴지도 모릅니다.”


“모른단 말이냐?” 판사는 어리둥절한 듯했다.


“기억이 안 납니다.” 리븐은 뒤쪽의 군중을 흘긋 곁눈질하다가 샤바의 눈과 마주쳤다. 늙은 여인도 같은 의문을 담고 있었다. 리븐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한 일입니까? 전투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입니다.”


리븐의 말에 사람들이 마음 속에 꾹꾹 눌러두었던 고통스러운 전쟁의 기억이 단숨에 되살아났다. 기억의 단편들이 서로를 밀치면서, 어깨를 부딪치면서, 비명을 지르면서, 제각기 주민들의 머릿속을 차지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녹서스의 쓰레기! 내 아들이 너 때문에 죽었어!”


곰팡이 핀 가지 하나가 어디선가 날아와 리븐의 뒷덜미에 맞았다. 썩어버린 즙과 걸쭉해진 속이 셔츠 등을 타고 내려가며 젖은 얼룩을 남겼다. 썩은 냄새가 피어올랐다. 리븐은 죽음의 냄새를 닮은 그 냄새 때문에 오래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그 가지가 신호라도 된 듯, 주민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리븐은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겪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제발.” 그녀는 나직이 읊조렸다. 주민들에게 그만하라고 간청해야 할지, 아니면 이들이 분노를 폭발시키도록 부추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가지가 더 많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몇 개는 돌 바닥에 떨어져 터졌고, 하나는 리븐의 무릎 뒤쪽을 때렸다. 리븐은 비틀거렸지만 손이 묶은 상태로 할 수 있는 한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판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민들과 리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치안판사의 법복을 펄럭이며 밤색 공을 받침대에 땅땅 두들겼다. 주민들이 앉아 있는 나무 긴 의자들이 치안판사의 의지에 화답하여 끼익끼익 소리와 함께 늘어났다 줄었다 하기 시작했다.


“이 공회당이 균형을 회복할 것을 요청합니다!”


판사의 질책에 주민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리븐. 우리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다.” 판사는 한층 자제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많은 아이오니아 인과… 녹서스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너는 어떠하냐?”


그것은 리븐을 괴롭히는 질문이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나는 죽음을 모면했을까? 리븐은 만족할 만한 답변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리븐은 나직히 말했다.


“그래.” 판사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리븐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가족이 목숨을 잃은 주민들을 달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들에게 진실을 말해 주어야 하지만, 자신에게는 말할 진실이 없었다. 그 당시 일에 대한 리븐의 기억은 망가졌다. 리븐은 고개를 숙였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판사는 심문을 멈추지 않았다. 공회당 안에 들끓는 분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 땅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마을까지 오게 된 거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에 여기 온 적이 있느냐?”


“그…” 리븐은 주저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순간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수마 원로와 만났느냐?”


그 이름을 듣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기억의 기억, 안개처럼 흐릿하면서도 동시에 예리한 것이 휙 스쳐지나갔다. 한때 과거가 자리잡았던 빈 자리를 분노가 채웠다. 리븐은 배신을 당했다. 그리고 배신을 했다.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리븐은 좌절감에 울컥 내뱉었다. 손목의 쇠고랑이 절렁절렁거렸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지.” 판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도 말이야.”


이것이 아이오니아의 이해인가. 리븐은 전의가 누그러들었다.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리븐은 농부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 판사들 앞에 놓인 증인석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굵은 눈썹에서 몇 가닥 삐져나온 털을 매만지는 아사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아사 콘테.” 판사가 천천히 말했다. “오-파, 오늘 우리와 지식을 나누러 오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븐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을 알고 있습니까?” 판사가 물었다.


“압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지난 습한 계절이 시작될 무렵 우리한테 왔습니다.”


“우리요?”


“나하고 아내, 샤바 말입니다.”


판사는 콘테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공회당 앞쪽 긴 의자에 앉아 여전히 불편한 기색으로 몸을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판사는 리븐을 가리켰다.


“이 여자가 당신들에게 왔다고요?”


“그러니까… 우리 밭에 있는 걸 내가 발견했습니다.” 노인은 멋쩍어 하며 말했다. “전날 밤에 송아지 한 마리가 없어져서, 새벽에 찾으러 나갔거든요. 그런데 송아지 대신 저 아이를 발견한 겁니다.”


놀람과 우려가 섞인 웅얼거림이 다시 공회당 안을 휩쓸었다.


“그럼 첩자잖아!”


“첩자가 더 많이 올 거야!”


“우리 마을은 우리가 지킬 수밖에 없어!”


판사가 탁자에 놓인 묵직한 나무 공에 손을 가져가자 소란은 멎었다. “그 여자가 무엇을 원했습니까, 콘테 씨?”


노인은 다시 눈썹을 매만지며 리븐을 흘긋 보았다.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죽기를 원했습니다, 치안판사 님.” 아사는 힘없이 말했다.


판사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땐 습한 계절이 시작될 무렵이었지요.” 아사는 말을 이었다. “아주 흠뻑 젖어 있더군요. 녹서스인답게 근육은 탄탄했지만 걸친 건 진흙뿐이었고, 열 때문에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저 여자가 녹서스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요?”


“무기를 갖고 있었거든요. 검이었어요. 칼집에는 녹서스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이오니아 인이라면 그런 무기를 갖고 다니지 않죠.”


판사는 입술을 오므렸다. “콘테 씨, 녹서스의 침공으로 잃은 것이 많으시지요?”


“그렇습니다, 치안판사 님.” 노인은 아내를 돌아보았다. “아들 둘을 잃었지요.”


“그래서 저 여자를 어떻게 했습니까?”


노인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집으로, 샤바에게 데려갔습니다.”


공회당 안의 주민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그토록 무자비했던 적에게 아사가 보인 너그러움을 믿을 수 없어서였다. 주민들의 얼굴마다 가족을 잃은 사연이 떠올랐다. 공회당 안에서 녹서스의 침공에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고 주민들을 돌아보았다. 단단히 닫힌 그들의 마음에 이의를 제기하겠다는 태도였다.


“내 아들들… 내 아들들의 뼈는 이미 오래 전에 하늘의 섭리에 씻겨나갔지요. 우리가 잃은 그 사람들이, 과연 우리가 슬픔에 빠져 그들 곁에 묻히기를 바랄까요?”


리븐의 눈에 노인과 그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보였다. 샤바의 눈은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우리는 아직 그들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목소리는 떨렸다. “스스로를 과거라는 진창 속에 파묻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있다면 말이죠.”


샤바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상체를 더 똑바로 세워 앉았다. 자신들의 선택을 비난하겠다면 어디 해보라는 자세였다. 아사는 군중들의 시선을 피해 돌아앉아 판사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가 앉은 걸상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그 동안 수많은 죽음이 있었습니다. 나는 또 하나의 죽음을 보탤 수 없었습니다.” 아사가 설명했다. “우리 부부는 저 아이를 씻기고 우리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판사는 아무 감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븐은 판사가 자신이 입은 셔츠와 바지를 유심히 보며 걷어올린 소맷자락을 상상으로 내려보는 것을 느꼈다. 리븐은 판사가 어떤 그림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았다. 자신 역시 농부의 아내가 그 옷을 내주었을 때부터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셔츠와 바지는 리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젊은 남자가 입을 만한 옷이었다. 어쩌면 샤바의 미소를, 어쩌면 아사의 친절한 눈매를 닮았을 남자.


리븐에게 그 생각은 자신의 나약함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다. 녹서스의 힘으로 살아오거나 죽어갔던 그 모든 세월. 그리고 리븐은 그 시간에서 미약하게나마 뻗어나온 희망을 받아들였고, 그 옷을 입고, 가족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에게 몸을 맡겼다.


“저 애는 원기를 회복한 후로 밭에서 일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늙은 농부는 말을 이었다. “아내와 나는 나이가 많죠. 그런 도움이 고마웠습니다.”


“목숨을 잃을까 두렵지 않았습니까?”


“저 아이는 녹서스와 관련된 건 쳐다보지도 않아요. 녹서스를 증오하니까요.”


“저 여자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니요. 저 앤 자기 과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어요. 한 번은 아내가 물어봤지만 아무 말도 안 하더군요. 우린 그런 걸 묻는 게 저 애에게 고통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 이후로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저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고향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어떻게 안다는 겁니까?”


아사 콘테는 눈을 비볐다. 그 얼굴에 난감한 표정,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잠시 후 늙은 농부는 공회당 안의 주민들을 의식하고는 빠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열에 들떠서 꿈을 꾸더군요, 치안판사님. 우리한테 온 그날 밤에요. 저 아이에게 속했던 무언가가, 저 아이가 아주 소중히 여겼던 무언가가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녹서스를 비난했습니다.”


“저 여자가 무엇에 대해 말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마도요, 치안판사님.” 늙은 농부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 아이의 칼자루 끝부분이 검집에 끈으로 묶여 있었거든요. 나흘 전에 저 아이가 그 끈을 푸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칼자루 안의 검날이 부러져 있는 것도요.”


그 날, 리븐은 헛간 안에서 그 모습을 본 것은 한창 쥐를 잡고 있던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녹서스 무기의 품질을 비웃는 몇 마디가 주민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럼, 그 지식으로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콘테 씨?”


“나는 그 검을 사원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판사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매처럼 휘어진 코 너머로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목적에서죠?”


“사제님들이라면 그 검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 검날이 다시 붙는다면, 저 아이를 괴롭히는 과거의 유령들이 저 아이를 놓아주지 않을까 해서요.” 등 뒤의 군중들이 다시 들끓었지만, 노인은 리븐과 그녀의 손을 결박한 쇠고랑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현재의 저 아이가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지식을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콘테 씨.” 판사가 그렇게 말하며 군중들을 노려보자 공회당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증언을 마쳐도 좋습니다.”


판사는 탁자에 펼쳐놓은 양피지를 내려다보다가 집행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무기를 가져오도록.”


사원 사제 두 명이 진홍색 천을 덮은 커다란 나무판을 가지고 들어와 판사들 앞 탁자에 조심조심 내려놓았다. 전투 사제 하나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세로로 홈을 새긴 나무 견갑과 흉갑으로 보아 고위층 사제임이 분명했다.


“보여주시죠.” 판사가 말했다.


전투 사제가 진홍색 천을 젖히자, 연 방패보다도 큰 검과 검집이 드러났다. 검집에는 우르 녹서스 글자가 예리하게 새겨져 있었다. 묵직한 각도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부드럽고 흐르는 듯한 아이오니아 글자와는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판사들의 주의를 끈 것은 검이었다. 검은 너무나 두툼하고 육중해서, 훈련을 잘 받은 전투 사제라도 한 팔로 들어올리려 했다가는 팔이 부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물며 그들 앞에 쇠고랑을 찬 채 서 있는 소녀의 가느다란 손목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사실 리븐 자신도 그 검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그 검은 조각조각이 나 있었다. 마치 성난 괴물의 발톱이 그 금속 날을 마구 찢어놓기라도 한 듯했다. 그 중 가장 큰 조각 다섯 개는 그 자체만으로도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러진 채 부드러운 아이오니아 천 위에 놓여 있어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검이었다.


판사가 리븐을 보았다. “이 무기는 네 것이겠지.”


리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산산조각이 났으니 휘두르는 건 어렵겠군.” 판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민들 사이에서 숨죽여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사제가 언짢은 듯 선 채로 자세를 바꾸었다. “이 무기에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치안판사님. 녹서스인들이 그 검에 마법을 부여한 겁니다.” 목소리에서 역겹다는 감정이 강하게 드러났다.


리븐은 판사가 그 말을 귀 기울여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판사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일 뿐 조각조각난 검날을 계속 살펴보고 있었다. 이윽고 리븐이 예감한 대로, 판사의 눈이 리븐이 채워넣으려 했던 검날의 빈 부분을 찾아냈다. 매처럼 휘어진 판사의 코가 실룩거렸다.


“한 조각이 빠졌군요.”


공회당에 불려나온 젊은 사원 달인은 초조한 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달인이여, 콘테 씨가 사원에 가져온 무기가 이것이 맞는가?” 중앙에 앉은 판사가 물었다.


“맞습니다, 치안판사님.”


“이 공판에 보고한 사람이 자네가 맞는가?”


“맞습니다, 치안판사님.”


“이 무기가 우리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젊은 달인은 긴 소맷자락에 양손을 비볐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아니면 돌 바닥에 토하기라도 할 것처럼 창백했다.


“달인?” 판사가 대답을 재촉했다.


“저는 유골 정화사입니다, 치안판사님.” 젊은 남자는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양손은 촛농처럼 축 늘어졌다. “원로님들이 하늘로 가시고 몸뚱이가 남으면, 그 뼈를 모아 준비를 하는 게 제 일입니다.”


“유골 정화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자네가 이 무기를 주목한 이유가 무엇이지?”


“검날과 같습니다.”


판사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군중들도 똑같이 어리둥절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번져나갔다. 하지만 리븐은 불안감이 뱃속에서부터 파도처럼 일어 피부를 뚫고 나오는 느낌이었다.


“제가 수마 원로의 뼈를 준비할 때, 그러니까, 그 분이 돌아가시고 사원에서 말입니다.” 달인의 설명은 아무 말이나 쏟아놓느라 요령부득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포기하고 망토 주름 안쪽에서 조그마한 비단주머니를 꺼내 길쭉한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매듭을 풀었다. 그러고는 안에서 금속 조각을 하나 찾아내어 높이 쳐들었다. “이 금속입니다, 치안판사님. 저 부러진 검날과 같습니다.”


달인은 종종걸음으로 판사에게 다가갔고, 판사는 그가 내민 손에서 조각을 받아들어 뒤집어 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부러진 검날의 금속과 아주 흡사했다.


리븐은 숨이 콱 막혔다. 그 조각은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다니다가 포기한, 과거의 기억의 단편이었다. 이제 기억의 단편들이 합쳐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 리븐의 마음 속, 잊혀졌던 어두운 구석이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리븐이 애써 깊숙이 파묻어 버렸던 죄책감이 마침내 고개를 내밀려 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밝혀질 사실에 대비해, 리븐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걸 어디서 찾았는가?” 판사가 물었다.


달인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수마 원로의 목뼈 쪽에 있었습니다.”


공회당을 메운 주민들이 헉 소리를 냈다.


“전에는 왜 이걸 가져오지 않았나?” 판사는 사냥감을 포착한 매 같은 기세로 눈을 가늘게 떴다.


“가져오려 했습니다.” 달인은 리븐의 부러진 검 옆에 서 있는 전투 사제를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그건 별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달인과 달리, 판사는 아무 거리낌없이 전투 사제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오시오.” 판사는 그렇게 명령하고, 부러진 금속 조각을 전투 사제에게 넘겨주었다. “나머지 조각들과 맞춰 보시오.”


전투 사제는 달인을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판사의 명령에 따랐다. 그는 리븐의 검으로 다가갔다가, 조각을 내려놓기 직전에 판사를 돌아보았다. “치안판사님, 이 무기에는 흑마법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조각을 맞추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집행하시오.” 판사의 어조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전투 사제는 검 쪽으로 돌아섰다. 공회당 안의 모든 눈길이 집중된 가운데, 그는 금속 조각을 부러진 검 끝쪽에 내려놓았다.


검은 조용했다.


판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리븐은 늙은 농부 부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들이 품었던 희망이 이제 끝났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리븐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나약했다. 이 세상에 누군가를 그토록 낙담시킬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잠시 동안이나마 리븐이 무고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노부부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이 되어버렸기에, 그것이 리븐을 아프게 했다. 이 자리에서 밝혀진 그녀의 과거는 그 어떤 검날보다도 날카롭고, 가슴 저미는 통증을 안겼다.


리븐의 귀에 검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발요.” 리븐은 목청을 높였다. 그녀는 공회당 안의 소란보다 더 크게 외치려고, 쇠고랑을 떨쳐버리려고 기를 썼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검의 진동이 커지면서, 이젠 공회당 안 어디에서나 그 떨림을 느끼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주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서로를 마구 밀치면서 뒤쪽으로 물러났다. 판사가 벌떡 일어나 부러진 검이 놓인 나무 탁자로 양손을 뻗었다. 탁자 가장자리가 마구 비틀리면서 커지기 시작했고, 탁자 위쪽에는 푸르른 가지들이 싹이 트듯 피어나 검 위쪽으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리븐은 그런 정도로는 마법을 막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들, 엎드려요!” 리븐은 고함을 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검에서 나오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소리는 점점 더 커지면서 아예 모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다음 순간, 검의 힘이 폭발하면서 룬 에너지와 나뭇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돌풍이 휘몰아치면서 그나마 서 있던 사람들도 모조리 돌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사람들의 얼굴이 리븐을 향했다.


리븐의 입술은 차가웠고, 뺨은 반대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마음 속 유령들, 철저하게 파묻어 버렸던 기억들, 그것들이 이제 완전히 되살아나 그녀의 눈앞에서 잇달아 어른거리며 솟아올랐다. 그들은 아이오니아의 농부들이었고, 아들과 딸들이었고, 이 마을 주민들, 결코 녹서스에 무릎 꿇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리븐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븐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죄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리븐의 동료 전사, 전우애로 맺어진 형제자매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제국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목숨을 바치려 했다. 하지만 리븐은 그들을 실망시켰다. 그녀는 녹서스의 깃발, 고향과 목적의식을 약속하는 깃발을 앞세워 그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배신당하고 버려졌다. 그들 모두가 전쟁이라는 역겨운 독에 목숨을 잃었다.


지금 그 유령들이 산 자들 가운데, 검의 힘에 쓰러진 마을 주민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주민들은 비틀비틀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리븐은 여전히 오래 전 그 때 그 골짜기에 서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죽음이 코와 목구멍을 조여왔다.

아냐, 이들은 죽었어. 현실이 아니야. 리븐은 자신을 타일렀다. 그녀는 아사와 샤바를 보았고, 두 사람도 그녀를 보았다. 그림자 두 개가 그들 근처에 서 있었다. 하나는 아사를 닮은 눈을 지녔고, 다른 하나는 샤바의 입매를 지녔다. 노부부는 주위를 감도는 죽음의 과거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의지하듯 꼭 끌어안은 채 서 있었다.


“디에다.” 샤바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리븐은 더 이상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안고 있을 수 없었다. 노부부가 전해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들의 판결에 순응하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책임을 져야 했다.


“내가 당신들의 원로를 죽였어요.” 리븐은 숨을 헐떡이며 고백했다.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가 공회당을 가득 채웠다. “내가 그 사람들을 모두 죽였어요.”



출처 : 리그 오브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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