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친구맞니?
몇 년 전 호주에 있었을 때 대만(臺灣)인 친구들과는 유독 친해지기 쉬웠다.
아무래도 같은 아시안끼리 공유하는 정서가 유사한 데다, 친구들이 한류 덕택인지 K-Pop가수나 드라마를 많이 알고 있어 말도 잘 통했기 때문이다. 몇몇 친구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도 했다. 매일 같이 대만인 친구들과 가라오케(노래방), 한국 음식점, 대만 디저트점 등을 다니며 즐겁게 보냈다. 이때 친구들과 그래스젤리, 타로 떡 등이 들어간 대만식 바오빙을 자주 먹었는데, 그 매력에 빠져 지금도 가끔 찾아다니곤 한다.
그런데 웃음 가득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순간순간 친구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이것이다. 하루는 한국식 분식집을 갔는데, 함께 김밥을 먹다가 "일본에도 김밥과 유사한 음식이 있다" "원조는 어디 것일까"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대만인 친구 세 명이 내게 "너는 어떻게 생각해" 묻기에 내가 "김밥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것 같아. 일본 노리마끼에서 유래됐다는 사람들도 있고, 한국 김쌈에서 유래했다는 사람들도 있고…"라고 말하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심지어 웃으면서 "일본 것이겠지" "역시, 너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이구나"라는 장난을 치는 친구도 있었다.
대만은 코트라(KOTRA) '2015년 한류의 경제적 효과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한류지수 세계 11위로 올라올 정도로 한류 열풍의 중심지다. 하지만 동시에 '반한 감정'도 널리 퍼져 있다. 한국 제품과 한국 문화에 대해선 흥미가 높지만 한국 국가와 한국인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훗날 일부 대만인 사이에서는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마치 정설처럼 퍼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2015년 대만 학자 궈추원(郭秋雯)이 대만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조사한 결과 강한 민족성, 애국, 승부욕, 적극성, 체면중시 등의 키워드가 나왔다. 2017년 그가 다시금 조사한 결과 술, 체면 중시, 성형, 보수적, 단결, 급한 성격, 배타적, 이기적, 승부욕 등의 대답이 나왔다. 그는 '한류 열풍'에 휩싸인 대만에서 전반적으로는 한국을 싫어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개인으로서 한류를 좋아하더라도 집단의 흐름에 따라 집단의 반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반한 감정이 심한 세대는 40~50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만에 반한 감정이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복합적 원인이 마구 얽혀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마움을 모르는 데 대한 일종의 배신감으로 보인다. 대만인과 대화하다 보면 '1992년 한국-대만 단교'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1949년 중화민국(中華民國)이던 시절 수교해 장기 우방국으로 지냈던 한국이 갑자기 단교를 통보했고, 그 과정이 도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 다수는 "'하나의 중국'(一個中國政策) 원칙에 따라 중국의 압박이 거셌다"거나 "대만과의 단교가 도미노처럼 이뤄지는 판국이었기에 오히려 신의를 오래 지킨 편이다"라고 받아친다.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타 국가들과 우호적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대만이었지만, 이전까지 공산주의 국가들과만 교류하던 중국이 1978년 경제현대화를 기치로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해 국제사회로 나오면서 급격히 무력해졌다. 많은 국가들은 '중국이냐 대만이냐'를 선택해야만 했고, 대다수 국가는 수교와 통상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중국을 택했다. 한국 역시 이 같은 흐름에 따라 대만과 단교하고 '비공식 최고관계'로 전환했다.
불과 몇 달 전인 지난 5~6월에도 도미니카, 파나마 등이 연달아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이제 대만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는 20개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국에게 특히 섭섭한 감정을 느낀 건 그전까지의 우호감이 상당히 컸고, 정치적 동맹이 굳세었기 때문이다.
도미니카공화국이 지난 5월30일 대만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중국과 국교를 맺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2016년 5월 '독립노선'을 견지하는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 취임 이후 중국의 고립화 전략에 따라 아프리카의 상투메프린시페와 파나마, 그리고 이번 도미니카공화국까지 모두 3개 나라가 대만과의 국교를 끊고 중국과 수교했다./사진=뉴스1
많은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지만, 대만(중국 국민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당시 대한제국처럼 일본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대만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 공원 의거(4·29의거)에 대해 깊이 감명 받고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한 항일독립운동 지원에 나섰다. 대만 초대 총통 장제스는 의거에 대해 "중국 100만 대군도 못할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찬사했다. 하지만 타국의 망명정부 지원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국제 사회 눈을 피해 '중국국민당'이나 장제스 개인의 명의, 혹은 그의 부인 쑹메이링 여사의 명의로 지원금을 지급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실장을 지낸 민필호 선생은 "우리의 대중국 외교는 '구흘적 외교'(求吃的外交·얻어 먹는 외교)다"라면서 가족을 꾸릴 생활비나 사무실 유지비용 등을 모두 대만의 지원에 의지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양측 독립 이후에도 한국과 대만은 모두 공산 진영과의 싸움에 돌입하는 처지에 처했다. 중국에서는 1946년 중화민국 정부를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내전이 펼쳐졌다. 결국 공산당이 승리해 국민당이 1949년 대만으로 패주, 중화민국을 건국했다. 한국 역시 한국전쟁을 겪고 남북이 쪼개져 남측 만의 정부를 수립해야만 했다. 중화민국은 '반공' 차원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한국을 1949년 1월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국가로 승인하고 서둘러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이 같은 과정을 겪으며 대만은 항일·반공 동맹으로 엮인 두 나라의 관계가 바뀔 수 없는 공고한 무엇이라고 인지하게 됐으며, 이것이 유난히 한국과의 단교를 섭섭하게 생각한 원인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이 같은 '고마움을 모르는 나라,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공고해진 데는 일제 식민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기여한 것 같다. 대만의 역사 교과서와 중국·한국의 교과서 사이에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크다. 세 곳의 역사 교과서 모두 일본 식민지 기간 수탈과 억압이 있었고, 이에 따라 저항이 거셌다고 기술돼 있다. 하지만 대만은 일제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대만의 다수(80~85%)를 차지하는 내성인(內省人·중국 명·청시기 이주한 한족이나 원주민 등 대만 토박이) 중에는 일제 식민지 때 보다는 이후 외성인(外省人·1949년 국민당이 본토에서 패주하자 국민당 정부와 함께 이주한 대륙인)들이 대만에 들어와 내성인을 핍박했다고 생각해 이 시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우리 보단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덜한 편이다.
이외에도 '한국에 대한 열등감'도 대만 반한 감정의 원인으로 꼽힌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만과 한국의 경제적 발전 양상은 유사했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만은 국제적 힘이 강했고 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으뜸으로 꼽혔다. 하지만 지금까지 삼성, LG 등을 필두로 세계 경제시장을 선두하는 한국과 달리 대만은 한국과 경쟁하는 반도체·전기 등의 산업에서 점차 밀렸다. 2004년에는 평균 국민 소득도 한국이 대만을 앞질렀다. 이제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한국은 대만을 앞선 현실이다.
대만인들은 역사적으로 내내, 그리고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해왔다. 대만 지리·역사 교과서는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지방 변방 정권 중 하나로 해석하면서 중국 중심적 사고를 보여준다. 또 중국의 선진문화가 지리적으로 근접한 국가들에게 문화적·정치적·군사적으로 영향을 줘 실질적으로 번속 관계(藩屬·속국)를 형성했다고 설명하면서 한민족에 대해 은연중에 우위적으로 생각하는 데 기여했다. 이 같은 생각 때문에 패배감이 더욱 컸다.
또 1990년대 말부터 하한(哈韓·한국 열기)이나 한류(韓流) 열풍이 생겼고, 2000년대 이르러 한류 열풍이 거세지면서 일종의 한류 백래시(backlash·사회 변화 등에 대한 대중의 반발)도 일었다. 한국의 대만에 대한 일방적 문화 진출이 불편하다는 여론이 생긴 것이다. 한류는 2004년 항공기 직항로 개설 등 민간 교류를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지만, 동시에 대만인들로 하여금 '우리의 고유 문화는 모두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두려움도 일게 만들었다.
2010년 11월17일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태권도 선수 양수쥔(楊淑君·오른쪽)이 실격패 판정을 받자 대만인들은 판정시비를 제기하며 태극기를 불태우고 한국제품 불매운동에 나서는 등 반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사진=뉴시스
대만인들이 한국에 대해 여러 복잡한 감정을 가진 사이 정치권과 언론에선 이를 이용했다. 한국에 대한 반감이 워낙 크니 선거에서 "한국을 이기겠다"고 공언하면 당선에 유리하고, 언론에서도 한국을 비방·폄훼한 기사를 쓰면 잘 읽히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만 태권도 선수 양수쥔(楊淑君)이 규정 위반을 이유로 실격패 당했는데, 심판이 한국계 필리핀이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이 악의적으로 대만을 지게 만들었다'는 여론이 생겼다. 대만 언론들은 선정적으로 이 같은 반한 감정을 부추겼고, 5개 직할시 시장과 시의원 선거를 맞이한 각 정당과 정치인들도 "한국을 꼭 이기겠다"며 선거에 악용했다.
이후 양수쥔 선수가 직접 나서 "내 실격은 한국과 전혀 관계없다"며 자제해달라고 인터뷰했으나 이미 달아오른 감정은 쉬이 식지 않았다. '양수쥔 사건'은 대만 사회 기저에 깔린 반한 감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는데, 이에 대해 당시 코트라 관계자는 "양수쥔 사건 이후 대만 방송에 나온 패널들이 '연평도 포격사건'에 대해 '기쁘다'는 표현까지 하는 데 대해 당황스러웠다"고 밝힌 바 있다. 대만 시민들은 총통 청사 앞에서 태극기를 찢고 불태웠고, 한국산 컵라면을 밟아 부수고 불매 운동을 벌였다. 대만 경찰이 주타이페이 한국대표부와 한국 학교에 대한 경비를 강화해야 했을 정도로 반한 감정이 고조됐다.
이후에도 대만 언론은 틈만 나면 '한국을 너무 이기고 싶다(好想贏韓國)'거나 '한국을 이기면 통쾌할 것이다(打贏韓國就是爽)'와 같은 문구를 빈번히 사용하며 반한 감정을 북돋았다. 대만 정치인들도 대내적 문제를 대외로 돌리고, 국민을 단결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할 때마다 한국을 정조준했다. 중국은 건드릴 수 없고 일본과는 친밀하니 한국이 적절한 제물이었던 셈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종의 계기만 생기면 반한 감정이 다시금 불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2010년 EU가 한국의 LG디스플레이, 삼성전자를 비롯 대만 치메이(奇美) 등의 5개사에 LCD 가격담합 과징금을 부여했는데, 삼성전자가 이 같은 사실을 자진신고해 리니언시 제도(담합 자진신고자 감면제)로 과징금을 면제받은 일이 있었다.
그저 그런 기업 이슈 중 하나로 끝날 사안처럼 느껴지지만, 치메이를 합병인수한 세계 최대 EMS 업체 혼하이(鴻海)그룹의 궈타이밍(郭台銘) 회장이 "경쟁자 등 뒤에 칼을 꽂는 소인배"라며 삼성전자를 비난했고, 스옌샹(施顔祥) 대만 경제부장이 "기업은 상거래 도의가 있어야 하고 일반적 상업 관습을 완전히 저버리고 '밀고'하는 행위는 상도덕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다"라고 공개 비난하면서 다시금 반한 감정에 불이 붙었다. 태극기가 찢어지고 불태워지는 장면이 대만 뉴스에 다시금 등장한 건 물론이다.
문제는 이 같은 반한 감정과 또 반한으로 인해 생겨나는 대만에 대한 반감 모두 장기적 관점에서 양국에 이득되는 게 없다는 것이다.
어떡하지??
출처 : https://v.kakao.com/v/20180813060306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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