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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NG/흥미

舊 롤러코스터 → 現 히치하이커 인터뷰

by Captain Jack 2018. 11. 7.

 

 舊 롤러코스터 

→ 現 히치하이커 인터뷰



▽ 예전에 좋아했던 가수 '롤러코스터'를 오랜만에 찾아보다가 '히치하이커'를 알게 되었다.

▽ 인터뷰가 상당히 흥미롭다. ㅇㅅㅇ



Q. ‘일레븐’을 내기 전에 ‘지누’란 이름으로 솔로앨범 3장을 냈다. ‘엉뚱한 상상’이 담긴 1집 속지에는 지누가 주인공인 카툰이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히치하이커: 당시 내가 만화 캐릭터로 등장한 건 (이)승환 형의 아이디어였다. 그때 난 제대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아서 어리버리한 상황이었다.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에도 승환 형이 시키는 데로 다 했다. 


Q. 이승환을 통해서 정식 데뷔한 것인가? 

히치하이커: 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했다. ‘전사’ ‘각시탈’ 등의 밴드를 했고, 1991년에 일본에서 열린 세계 대학생 음악축제에 나가서 기타리스트로 상도 받았다. 해군 홍보단에서 (유)희열이와 알게 됐는데, 희열이의 소개로 승환 형을 만나게 된 거다. 군대에서 30곡 정도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 당시 잘나가던 DJ DOC에게 팔고 싶었던 곡이 있었다. 그게 ‘엉뚱한 상상’이었다. 


Q. 본인이 노래하려고 만든 곡이 아니고? 

히치하이커: 사실 승환이 형을 만나면 ‘엉뚱한 상상’을 들려주고 DJ DOC를 소개시켜달라고 말하려 했다. 희열이랑 같이 휴가를 나가서 한 카페의 주차장에서 비밀 접선하듯이 만났다. 30곡이 담긴 90분짜리 카세트테이프를 건넸는데 승환 형이 그 자리에서 그걸 끝까지 다 듣더라. 그리고 나서 제대가 언제냐고 묻더니, 이 음반을 직접 해볼 생각이 없냐고 하시더라. 나는 황당해서 네?


Q. 그렇게 데뷔를 하게 된 것인가? 

히치하이커: 그때가 26살이었다. 데뷔는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1집 앨범이 나왔고, ‘엉뚱한 상상’이 화제가 됐는데 정작 앨범 판매는 저조했다. 


Q. 이승환도 지누 1~2집 판매가 저조했던 것을 아쉬워하더라.

히치하이커: 그래서 승환 형에게 너무 죄송했다. 상당히 돈을 많이 들인 앨범이었기 때문이다. 승환 형이 드림팩토리 스튜디오를 만든 것도 내 데뷔앨범을 내기 위해서였다. 난 너무 미안해서 조건 없이 한 장을 더 만들겠다고 했다. 그래서 2집을 만들 때에는 최대한 돈을 쓰지 않기 위해서 원맨밴드 형식으로 녹음을 했다. 녹음실에 아무도 없는 시간에 거기서 혼자 먹고 자고 하면서 음악을 만들었다. 결국 2집도 잘 안 됐지만, 그 작업을 하면서 혼자서 하는 작업에 큰 매력을 느꼈다. 공동 작업을 할 때에는 서로 의견을 조율해야하지만, 혼자서 악기를 연주하고, 또 미디로 모든 것을 만들면 조금 어설퍼도 나만의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에 홈레코딩 방식으로 롤러코스터의 앨범을 만들게 된 것이다. 


Q. 롤러코스터는 1집부터 5집까지 매번 다른 스타일을 선보였다. 지금과 같은 일렉트로 팝을 시도한 것은 ‘라스트 신(Last Scene)’이 담긴 3집 ‘앱솔루트(Absolute)’부터였다. 

히치하이커: 그렇다. 그 앨범이 롤러코스터 앨범 중에 가장 잘 됐다. 10만 장이 팔렸는데 당시 밴드 중에는 굉장히 많이 팔린 거였다. 그런데 이후 롤러코스터의 음악이 점점 복잡해졌다. 욕심이 생겨서 더 멋진 음악을 하려 했는데 대중과는 멀어지게 됐다. 


Q. 4집 타이틀곡 ‘무지개’도 1~3집에 비해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히치하이커: 하하, 그 노래는 정말 히트곡을 내려고 만든 곡이었는데.


Q. 히트 작곡가로서 감은 없었나보다. 

히치하이커: 맞다. 아무런 감이 없었다.(웃음)


Q. 롤러코스터 해체 후에는 클럽 DJ로 변신했다. 밴드음악을 하던 사람이 전자음악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계기가 있었나?

히치하이커: 모든 뮤지션들이 그럴 텐데, 자기가 하고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동경이 점점 없어진다. 밴드음악에 대한 동경이 점점 생기지 않았고, 지겨워지기까지 했다. 그때 돌파구가 된 것이 전자음악이었다. 이 음악은 멤버들끼리 타협을 해야하는 밴드와 달리 순전히 내 생각대로만 갈 수 있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DJ를 처음 시작한 것은 롤러코스터를 하던 2000년이었다. 당시 홍대의 ‘108’이라는 클럽에 갔다가 DJ 반디가 튼 모조의 ‘레이디’, 몰로코의 ‘싱 잇 백(Sing It Back)’을 듣고 너무 좋아서 미친 듯이 춤을 췄고, DJ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달파란도 DJ를 하고 있었다. 사실 최초로 홈레코딩을 한 것은 내가 아니고 달파란 형이다. 삐삐밴드 2집이 홈레코딩으로 작업됐고, 내가 그걸 보고 자극을 많이 받았다. 달파란은 존경하는 선배임과 동시에 롤모델이었다. 


Q. 2006년에 작업했던 엄정화의 앨범 ‘프레스티지(Prestige)’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이 앨범은 한국대중음악상을 수상했고, 엄정화 앨범 중에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히치하이커: 그 앨범은 다시 프로듀서로 복귀한 앨범이었다. 어느 날 정화 누나에게 “지누! 나 앨범 내야 돼, 네가 해줘야지!”라고 전화가 왔다. 누나는 그때까지 많은 히트곡이 있었는데 음악적으로도 근사하고, 의미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어 했다. 누나와 작사 작곡을 거의 함께 한 앨범이었다. 내가 곡을 만들면 누나가 자기에 맞게 바꾸기도 하고, 내가 멜로디가 안 떠오르면 누나가 만들어보기도 했다.


Q. 이후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가 그야말로 빵 터졌다.

히치하이커: 그 곡을 하기까지 사연이 좀 있다. 당시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음악을 하다 보니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은 음악을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컴퓨터에 깔린 음악 프로그램을 다 지우고 하드를 포맷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한 통 왔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소속사 내가네트워크인데 ‘어쩌다’라는 곡을 리믹스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곡을 리믹스해서 보내줬더니, 곡이 마음에 든다며 신곡을 줄 수 있냐고 연락이 다시 왔다. 고민을 하다가 내가 클럽 DJ 시절 틀었던 트랙을 하나 보내줬다. 그게 바로 ‘아브라카다브라’의 트랙이었다. 


Q. 원래는 걸그룹에게 줄 트랙이 아니었던 거였군.

히치하이커: 트랙이 마음에 든다며 타이틀곡으로 하겠다고 하더라. 내심 걱정이 됐다. 대중적인 감각과 거리가 먼 내가 듣기에도 이건 히트할 곡이 아니었다. 걸그룹이 ‘딥 하우스’를 하는 게 말이 되나? 처음 내가 준 트랙에는 후렴구가 없었다. 나에게 후렴구를 만들어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도저히 대중적인 게 안 나오는 거다. 그래서 내가네트워크 쪽에서 이민수 작곡가에게 후렴구를 맡기면 어떻겠냐고 전화가 왔다. 그때는 누가 내 곡에 손을 댄다는 것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럴 거면 쓰지 말라”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마침 갓난아기였던 딸아이가 저쪽 소파에서 막 우는 거다. 그래서 난 “그럼 맘대로 하세요”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아기에게 달려갔다. 덕분에 이민수 작곡가가 사비를 만들어 붙이고, 김이나 작사가가 가사를 써서 ‘아브라카다브라’가 탄생한 것이다. 


Q. 그렇게 탄생한 ‘아브라카다브라’는 국내 아이돌음악도 웰메이드 음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시금석과 같은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히치하이커: 당시 내가네트워크의 프로덕션팀인 조영철 프로듀서, 이민수 작곡가 김이나 작사가의 대중적인 감이 좋았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고, 전에 만들어놨던 내 음악을 줬을 뿐이다. 난 그때 ‘지(Gee)’가 소녀시대의 노래인지도 몰랐다. ‘아브라카다브라’ 첫 방송을 보는데 사운드가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고, 반응도 별로인 것 같더라. 그래서 담배를 피면서 ‘내 마지막 음악작업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난 정말 운이 지지리도 없다. 어서 하드 포맷하자’고 속으로 한탄을 했다. 그런데 와이프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난리가 났다고 말해주더라. 그런데 실제로 난리가 났더라.


Q.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히트곡의 맛이었겠다.

히치하이커: 맞다. ‘음악성이 좋다’ ‘마니아가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중이 다 아는 히트곡은 없었으니까. 


Q. 이후 아이돌그룹의 작곡가로 변신하게 된다.

히치하이커: ‘아브라카다브라’ 작업을 하면서 전에 내가 작업했던 일렉트로 곡들이 가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음악적인 에너지가 다시 생기기 시작했고, 내 트랙들을 팔기 위해 여기저기 기획사에 전화를 걸었다. SM에도 전화를 걸었다. 대표번호로 말이다.(웃음) 여차저차해서 지금은 그룹장인 당시 이성수 A&R 팀장에게 연락이 닿았다. 곡을 주고 싶다고 하니 당장 만나자고 하더라. 다섯 곡을 들고 갔는데 가만히 앉아서 다 들어보더니 모두 쓰고 싶다고 했다. 이성수 팀장은 내가 롤러코스터 때 했던 ‘습관’ ‘힘을 내요 미스터김’과 같은 음악을 가져올 걸로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그때 가져간 게 소녀시대의 ‘쇼쇼쇼’ 동방신기의 ‘아이 돈 노우’ 에프엑스의 ‘아이스크림’ 인피니트의 ‘다시 돌아와’와 같은 곡들이었다. 이후 YG 등 여러 회사들과 작업을 했는데 SM이 가장 적극적으로 내 곡을 써줬다. 또 SM을 통해 해외 작곡가들과 공동작업도 많이 했다. 


Q. 히치하이커란 이름은 어떻게 사용하게 됐나?

히치하이커: ‘아브라카다브라’를 작업할 때 만든 이름이다. 당시 소녀시대, 빅뱅 리믹스 작업을 동시에 했는데 이들은 이미 유명한 스타들이었다. 내가 그들을 창조한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러다보니 내가 잘나가는 사람들의 차에 올라타는 편승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히치하이커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Q. 이제는 그들의 음악, 이미지를 창조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또 히치하이커의 음악은 아이돌그룹이 시도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넓힌 것으로 평가받는다.

히치하이커: 워낙에 내가 전에 좋아하던 스타일을 만들다보니 그런 것 같다. 내가 예전에 하던 음악들을 아이돌음악에 접목을 할 수 있는 것은 SM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사실 내 데모 곡들을 여러 회사에 줬지만, 그것을 쓰겠다는 회사는 SM밖에 없었다. 다른 회사들은 내 곡이 어렵다고들 하더라.


Q. 작업할 때 혹시 이수만 대표 프로듀서가 어떤 주문을 하는 경우가 있나?

히치하이커: 직접 의견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A&R 직원들을 통해 작업의 방향성에 대해 공유한다. SM에서 나오는 모든 음악, 공연들에 대해서는 모두 직접 의견을 주신다. 실제로 음악을 다 들어보시고 가사 한마디, 한마디에까지 신경을 쓰신다. 단순히 제작자가 아니라 진짜 총괄 프로듀서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Q. SM의 음악은 다른 아이돌 기획사와 비교했을 때 일반적인 히트공식을 따라가기 보다는 작품적인 면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음악을 잘 만든다고 잘 팔리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노선이 확실하다.

히치하이커: 흔하지 않은 것을 시도해보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다. 데모를 만들면 회사 분들에게 들려준다. 들어본 후 동방신기에게 줄지, 에프엑스에게 줄지 결정을 하고 여러 가지 의견을 주고받는데, 회사 분들이 나에게 대중적인 코드를 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른 회사와는 정반대다. 다른 기획사의 경우 ‘대중성이 없다. 훅이 없어서 곤란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곤 한다. SM의 경우 음악적인 완성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운드, 가사적인 완성도가 자사 뮤지션들의 퀄리티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Q. 원래 기타리스트로 출발했다. 처음 롤러코스터를 결성할 때 이상순이 기타 치는 것을 보고 반해서 본인은 베이스로 전향한 것으로 알고 있다. 

히치하이커: 맞다. 상순이를 기타리스트로 하고, 내가 베이스를 친다고 하니 다들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연습을 정말 많이 했다. 내 솔로 2집 앨범재킷에 보면 텔래캐스터 빈티지 모델을 들고 있는데, 그 기타를 낙원상가에 가지고 가서 베이스 바꿨다. 그 베이스를 아직도 SM 작업을 할 때 직접 연주한다. 내가 만드는 곡들은 모두 내가 직접 기타, 베이스, 신디사이저를 연주한다.



출처 : 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321784#_enli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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