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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NG/LOL

[LOL 단편소설] 모르가나 - 허물어진 신전에 올리는 기도

by Captain Jack 2019. 6. 2.

 

[LOL 단편소설]

 

모르가나

 

 


허물어진 신전에 올리는 기도

HUBERT ROBERT - The Ruins of the Macellum (‘Temple of Jupiter Serapis’) at Pozzuoli


 

 

리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린은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몇 발 앞서가던 그의 대고모가 돌아봤다.

"나 같은 늙은이도 못 따라잡는 게냐?" 그녀가 키득거렸다.

"아니에요." 린은 자신의 신발을 보며 중얼거렸다. 린의 대고모 페리아는 머리카락이 눈처럼 하얬고,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구부정했지만 린보다는 여전히 키가 조금 더 컸다. 린은 지긋지긋한 자신의 형만큼 크길 바랐다. 린의 형은 두 사람보다도 키가 훨씬 컸다.

린은 숲의 이쪽 구역에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이곳 소나무들은 어찌나 빽빽이 자랐는지 한낮의 햇빛마저도 그림자에 가려 흐릿해질 정도였다.

앞서가던 페리아가 갑자기 멈춰 섰다. 린은 페리아가 이끼로 뒤덮인 바위를 보고 멈춰 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바위가 아니라 오랜 세월에 의해 침식된 조각상이었다. 린은 주머니에 있는 돌멩이들을 만지작거렸다.

"아하! 이게 누구의 조각상인지 알겠니?" 페리아가 물었다.

"음... 도시에 살던 옛 귀족인가요?"

"천만에!" 페리아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이들에게 그녀는 그저 그림자이자 신화 같은 존재였지. 사람들은 그녀를 '가려진 자'라고 불렀어."

페리아는 등불을 들어 조각상을 비췄다. 조각상의 왼팔은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고 없었고, 오른팔은 마치 두 사람에게 손짓하듯이 손바닥을 펴고 있었다. 조각상의 머리를 덮고 있는 쓰개는 정교한 솜씨로 깎아낸 듯 보였지만, 지금은 덩굴로 덮여 있었다. 어깨 뒤로 솟아난 날개는 부서지거나 풍화되어 날갯죽지만 남아 있었다. 린은 조각상의 얼굴 일부가 심하게 부서져 있는 것을 보고 몸서리쳤다. 얼굴의 멀쩡한 부분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 눈에는 얼룩이 있었고, 신 우유를 토해낼 듯이 악의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니?" 페리아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 건 너뿐만이 아니었단다. 그녀는 별로 인기가 없었어. 하지만 '복수'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정통했지."

들키지 않게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던 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네 주머니에서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형한테 빨리 복수하고 싶은 거 알아. 그래도 그 애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니."

"도낏자루로 제 눈을 때렸다고요!" 린이 소리쳤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면 뭐죠? 가르침이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오히려 형 아닌가요?"

"나무 패는 법을 알려주려고 했을 뿐이야. 널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어. 너도 잘 알잖니."

"형도 저처럼 눈에 멍이 들어야죠!"

"그렇게 하면 네 형이 어떤 가르침을 얻을 거라 생각하니?"

린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대답을 페리아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답 안 해? 그럼 이야기를 하나 해 줄 테니 잘 들으렴."

린은 조각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손으로 머리를 괴었다.

"오래전, 아주 깊고 어두컴컴한 숲에 가려진 자가 살고 있었어. 정착지와 멀리 떨어진 그곳에선 나무가 너무 빽빽하게 자란 나머지 하늘도 별도 보이지 않았지. 하지만 소수이긴 해도 그녀와 대화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어. 사람들은 가려진 자가 여명보다도 먼저 태어났고, 세상 누구보다 지혜롭다고 믿었기 때문에 까다로운 분쟁이 발생하면 그녀를 찾아가 조정을 부탁했지. 사람들은 지혜와 용서, 그리고 종종 징벌을 구하기 위해 가려진 자를 찾아갔어. 그렇지만 그들은 신중했어. 자칫하면 가혹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거든."

"그러던 어느 날, 한 성직자와 그의 제자가 가려진 자를 찾아 숲으로 들어갔어. 분노에 사로잡힌 제자가 성직자를 향해 향로를 집어 던졌기 때문이지. 타오르는 향은 성직자의 얼굴에 끔찍한 화상을 입혔고, 제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싶어 했어."

"하루를 꼬박 걸어간 두 사람은 마침내 가려진 자를 찾을 수 있었어."

"그들은 촛불이 켜져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어. 천장에서는 물이 떨어졌고, 벽에는 신비한 묘약들이 진열되어 있었지. 안에선 진흙과 이끼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에는 새까만 깃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어."

"순간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어. 바로 가려진 자였지. 검은색 쓰개가 몸을 대부분 가리고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보라색을 띠며 무시무시하게 빛났어. 돌바닥이 차가웠지만, 그녀는 맨발로 서 있었지. 제자가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는 동안 그녀는 제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어."

"그러다 마침내 가려진 자가 입을 열었어. '네 행동은 실수가 아니군.'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지. '너는 목적과 확신을 가지고 행동했어. 하지만 네 스승을 다치게 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지.'"

"제자가 대답했어. '네, 저는 속죄를 통해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겸허한 자는 죄책감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왜 네 스승을 공격했지?' 그녀가 제자에게 물었어."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제자가 대답했어."

"'그럴지도. 무엇 때문에 화가 났지?'"

"제자는 성직자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떨구었어."

"'저는 어리석게도 스승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제자가 대답했어."

"'무슨 가르침이었지?'"

"제자가 대답하려고 할 때 성직자가 끼어들었어."

"'저는 다양한 지도 방법을 통해 제자들에게 예의와 인내, 절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가끔 필요한 경우 채찍을 사용합니다. 저도 내키지는 않지만,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은 제 신성한 의무니까요.'"

"가려진 자는 성직자를 응시했어. 쓰개 너머로 번득이는 눈빛은 성직자를 뚫어버릴 기세였지."

"그녀가 말했어. '내키지 않는다니. 너는 '즐기고' 있어.'"

"'그게 무슨—'"

"'대답해 봐라, 상처 입은 스승이여. 네 채찍질은 진정 제자들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고통에 즐거워하는 자신을 위한 것인가?' 가려진 자가 물었어."

"제자가 끼어들었어. '아닙니다. 스승님께서는 저희를 아끼시—'"

"순간 성직자가 손을 들어 제자를 후려쳤어."

"'나를 변호하는 데 네놈의 거짓말 따윈 필요 없다.' 흉터로 얼룩진 성직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지."

"가려진 자가 손바닥을 내밀자 암흑 불꽃의 사슬이 뿜어져 나와 성직자를 속박했어.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사슬은 실체가 없었지만, 성직자는 꼼짝도 할 수 없었지."

"'너는 타인을 벌하기 위해 이곳에 왔군.' 그녀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어. '하지만 정작 자신이 지은 죄는 모르고 있지. 네 역겨운 자만심은 점점 부풀어 올라 너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네놈을 위해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 네가 그동안 초래한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해 주지.'"

"가려진 자는 사슬을 통해 성직자가 제자들에게 안겼던 수치심과 고통, 고독을 그 역시 똑같이 느낄 수 있게 했어.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무게가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자 성직자의 심장은 순간 멈춰버렸지. 암흑 불꽃이 성직자의 몸을 집어삼키자,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무릎을 꿇었어."

"'제발 멈춰주십시오!' 제자가 소리쳤어. '스승님은 이미 충분히 고통받으셨습니다. 제가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너는 아직도 네 스승을 변호하는군.' 가려진 자가 말했어. '죽음이 자비를 베풀 때까지 이자는 잘못을 더 깨우쳐야 해. 자신이 초래한 고통을 홀로 오롯이 느껴 봐야 다시는 남을 해치지 않는 법이지. 너는 용서를 구하려고 이곳에 왔다. 그 짐은 이제 네가 짊어져야 한다.'"

"그 후 오랫동안 제자는 수도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하지만 굶주림과 피로를 견디지 못한 그는 채찍질에 대한 공포도 잊은 채 결국 수도원으로 돌아갔어. 그곳에서 제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성직자와 마주했지. 과거 자신을 가르친 가혹하고 무정했던 스승은 너그럽고 온화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어. 비록 얼굴에 난 화상의 흉터는 아물지 않았지만, 가려진 자가 전해준 교훈은 그보다 더 깊게 파고들었지."

페리아는 조각상 아래에 등불을 내려놓았다. 반쪽만 남은 조각상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쓰개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마치 눈물이 흐르듯 가물거렸다.

"린, 남을 벌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해. 너는 형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니? 설사 일부러 네 얼굴을 쳤다고 하더라도, 네 멋대로 형을 벌하는 건 옳지 않아."

린은 주머니 속 돌멩이를 만지작거렸다.

"생각해보니 제가 눈을 맞고 쓰러진 '다음에' 형이 저한테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아요." 린은 마지못해 돌멩이를 바닥에 버렸다.

"훌륭하구나! 가려진 자에게 감사 인사를 올려야겠어."

페리아는 등불 안에서 타오르던 촛불을 껐다.

"기억해. 복수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행동이야. 하지만 가르침은 이타심에서 비롯되지." 페리아가 웃으며 덧붙였다. "잊지 마. 내가 지켜볼 거야. 어쩌면 가려진 자도 너를 지켜볼지도 모르지!"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연기는 조각상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린은 조각상의 눈 주위에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봤다. 린은 뒤를 돌아봤다. 페리아 대고모는 이미 마을을 향해 나무들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린은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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