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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NG/LOL

[LOL 단편소설] 진보의 날

by Captain Jack 2018. 11. 17.

 

[LOL 단편소설]


진보의 날


 



타마라는 일찍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맨땅에서 낙엽을 이불 삼아 노숙하며 지낼 때는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게 되지만, 지금처럼 아늑한 3층 하숙방에서 거위털 매트리스에 누워 보드라운 무명 이불을 덮고 있으면 그러기가 영 쉽지 않았다. 젖혀진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따스한 햇볕이 바닥에 비치고 있었다. 필트오버에서 보낸 첫날 밤에는 커튼을 닫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랬더니 동이 트고도 두 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깨어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후로는 늘 커튼을 열어두고 잠에 들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가로 걸어가서,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색유리 창은 공방에서 제조되었을 때 묻은 검댕으로 거뭇거뭇했다.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그녀의 몸 위에 아른거렸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이리처럼 미끈하고 근육이 탄탄했지만, 그럼에도 배 근육이 물러졌을까 싶어 그녀는 한 손으로 배를 문질러 보았다. 창밖으로 펼쳐진 자갈길에는 벌써부터 진보의 날을 맞아 장사를 준비하러 나온 노점상들로 분주했다. 이 상서로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건물마다 걸린 알록달록한 깃발들 덕분에 좁은 골목길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타마라가 나고 자란 도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저 멀리 명문가들이 밀집한 언덕에 늘어선 탑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필트오버의 골목골목을 누비고 흐른다는 소위 ‘황금의 강’이 흘러나오는 진원지가 바로 저곳이었다.


타마라는 그 생각에 씩 웃고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방은 무척 깔끔했다. 모든 게 제자리에 정돈되어 있었다. 작업대의 한쪽 귀퉁이에 공책이 가지런히 쌓여 있고, 그 옆에는 치수 측정기, 설계도 등의 도구들과, 어제 점심때 먹지 않고 남겨둔 흑빵, 치즈, 말린 과일이 모슬린 보자기에 고이 싸인 채 놓여 있었다. 벽돌로 된 벽에는 작은 금속가공용 용광로가 붙박여 있고, 거기서 나오는 연기는 여러 개의 쇠 파이프를 통해 위로 빨려 올라갔다. 책상 한가운데에 놓인 나무 상자 안에는 그녀가 여러 달 공들여 제작한 발명품이 들어 있었고, 그 기계의 설계도가 새겨진 종이 뭉치는 매트리스 밑에 잘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침대 밑에서 요강을 꺼내 용변을 본 다음, 집주인이 내준 파우더와 염료로 간단히 화장을 했다. 그리고 견습생을 위한 튼튼한 작업복을 입었다. 단순한 디자인의 레깅스와 주머니가 많은 속 셔츠, 그리고 한 번에 입고 벗을 수 있도록 고안된 편안한 재킷이었다. 옷을 다 차려 입은 그녀는 방문에 달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긴 흑발을 귀 뒤로 쓸어 넘기고서 가죽끈과 구리 핀으로 정돈했다. 그리고 높은 광대뼈와 턱선을 손가락으로 훑어보았다.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콜레트는 그녀가 더 꾸미면 예쁠 거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그 친구는 아직 어려서 너무 눈에 띄는 존재가 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발명품이 든 나무 상자를 가방에 집어넣고, 모슬린 천에 싸인 도시락, 공책과 연필을 챙겼다. 초조감이 들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문 앞을 막아둔 의자를 치우고, 문에 설치된 회전반을 돌려서 빗장을 풀었다. 고향에 비하면 필트오버는 안전한 곳이었다. 강력 범죄 발생률이 터무니없이 낮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곳 주민들은 여느 도시들에 횡행하는 일상적인 폭력에서 자유로웠지만, 그 평화를 자물쇠 없이 얻을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진보의 날’을 앞둔 몇 주 동안에는 더욱 문단속을 확실히 해야 한다.


타마라는 문을 잠그고, 복도에 있는 분뇨 배출용 투입구에 요강을 비웠다. 한때는 이렇게 버린 분뇨가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했는데, 생각해보니 답은 간단했다. 당연히 더 낮은 데로 흘러내려 가겠지. 아마도 자운 어디께에는 유별나게 꽃이 만발하는 정원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요강을 수거함에 내놓고,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 공용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그녀의 동료 견습생들이 몇 명 있었다. 아침을 먹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몇몇은 제작 중인 장치를 붙잡고 미친 듯이 씨름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명문가들의 눈에 들 만한 발명품을 만들어내려고 용을 쓰는 기색이었다. 그걸 본 타마라는 어깨에 걸멘 가방으로 저절로 손이 갔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자신의 작품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정확히 설계도와 똑같이 제작했지만, 마무리 작업만큼은 그녀의 철저하고 절제된 작업 스타일에서 약간 벗어나 멋을 좀 부렸다.


동료들이 지친 기색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마주 인사만 하고, 그들과 잡담을 나누진 않고 곧바로 지나쳐 걸어갔다. 그 견습생들 중 일부는 지난 두 주 동안 하루에 두어 시간 정도밖에 못 잤을 것이다. 어느 한 명쯤은 오늘 시험을 치다가 쓰러져 잠들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붙들리기 전에 얼른 식당 출입문 밖으로 빠져나간 뒤, 잠시 멈춰 서서 눈 부신 햇살에 눈이 적응될 때까지 기다렸다.


길에 늘어선 고층 건물들은 네모지게 절단된 석회석과 모서리 부분이 경사지게 깎인 목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청동 벽과 구리 처마, 여러 장의 유리로 무늬를 낸 창문들이 햇빛을 받아 온통 반짝거렸다. 길거리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배달부들이 인파 사이를 거칠게 비집고 지나갔고, 집행관, 주류 판매업자, 할부 판매원이 배달부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흔들었다. 몇몇 떠돌이 장물아비들은 배럴 위에 캔버스 천을 덮어놓고 수상쩍은 물건들을 늘어놓았는데, 순찰대가 나타나면 언제라도 재빨리 장사를 걷어치우고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포효까지 차편을 얻어 타고 왔을 소매치기들은 길가에 도사린 채 인파를 둘러보며, 슬쩍하기 좋은 호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렸다. 척 보니 젊고 미숙한 소매치기들이었다. 더 노련한 고참 녀석들은 협곡을 건너는 다리 같은 손쉬운 구역들을 꿰어차고 있을 것이다.


타마라는 침착한 걸음으로 또박또박 길을 걸어가면서 소매치기들을 예의주시했다. 수중에 돈이 될 만한 것은 별로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잃어버리면 안 될 중요한 물건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근처의 노천 식당에서 생선 굽는 냄새와 함께 갓 구운 슈리마 태양빵 냄새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입에 절로 침이 고였지만, 식당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침 지나가던 행상인을 멈춰 세웠다. 수레 위의 통에는 쉭쉭 김을 뿜는 파이프가 달려 있었고 둥그런 통 속에 따끈한 간식거리가 가득했다. 타마라는 따뜻한 허브차와 달콤한 빵 하나를 달라고 했다. 이 도시에서 지내면서 그녀가 중독되다시피 맛을 들인 빵이었다.


타마라가 음식 값으로 은 부속품을 행상인의 손에 쥐여주고 거스름돈은 가지라고 하자, 그녀가 덕담을 해주었다. “즐거운 진보의 날 되세요, 손님! 오늘 하루 손님의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길 빌어요.”


행상인의 억양이 기묘하게 단조롭고 느긋하게 들렸다. 마치 시간이 엄청나게 많아서 자신이 원하면 무슨 말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이곳은 경계 구역 시장에 가까우니만큼 저렇게 부자연스러운 억양을 쓰는 사람들을 많이 마주칠 수 있었다. 필트오버인인 척하는 외지인들, 필트오버 소속이더라도 자운 쪽에 더 동조적인 중간자들이 이곳에는 많았다.


“고맙습니다. 자운의 잿빛 대기가 당신에게 닿지 않기를.”


여자는 자기 머리와 가슴을 손으로 두드려 인사해 보였다. 부모님 중 한 쪽은 자운, 한 쪽은 필트오버 출신이라는 뜻이었다. 양국 국민은 서로가 완전히 동떨어진 나라인 것처럼 굴지만, 실제로는 서로 밀접하게 뒤얽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타마라는 빵을 게걸스레 먹어 치운 뒤 길을 걸어갔다. 정확히 스무 발짝 너머, 이 길의 끝자락에 이르면 더 넓은 간선도로인 ‘시계학의 도로’가 나오게 되어 있었다. 길 끝에 다다른 그녀는 차를 마저 마시고, 오른쪽으로 꺾어서 교차로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발걸음 수를 헤아렸다. 이제 슬슬 연마된 화강암과 철 세공 기둥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활하는 견습생 구역에서는 볼 수 없는 건물들이었다.


대부분의 건물은 화학공학 기법으로 만들어진 램프로 불을 밝히고 있다. 특유의 불빛이 아침 공기에 쨍하고 차가운 색조를 드리웠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불을 켜놓을 필요는 없었지만, 필트오버 사회는 부와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워낙 강하다. 부는 곧 힘이요, 힘은 곧 부를 안겨준다는 식이다. 그런 사상은 이곳의 문화 구석구석에서 나타났다. 사람들이 입는 옷의 재단이며, 알록달록한 색깔을 좋아하는 성향, 대대적인 자선 사업에 이르기까지. 당장 그녀의 주위에서 아침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만 해도 화려한 강화 장비로 몸을 둘렀다. 어떤 여자는 마법공학으로 만든, 보석 모양 확대경이 박힌 보강판이 한쪽 뺨과 눈 위에 이식되어 있었다. 그녀와 팔짱을 낀 남자는 빛나는 문양이 아른거리는 건틀릿을 한쪽 손에 끼고 있었다. 거리 건너편, 작업복 차림의 남자의 구부정한 등에는 웬 탱크 같은 장비가 장착되어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녹색 액체를 채운 그 탱크에서 증기가 뿜어 나왔는데, 아마 호흡을 돕는 장치인 것 같았다.


타마라는 경탄스러운 눈길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숙련된 눈은 다른 이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들이 착용한 마법공학 장비 중 두 개는 가짜였다.


타마라는 필트오버의 첨단 기술을 면밀히 연구했기에,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예컨대 확대경 보강판을 얼굴에 이식한 듯 보이는 여자는 사실, 뺨 위에 은판을 풀로 붙이고 보석 세공사들이 쓰는 단순한 렌즈를 낀 것에 불과했다. 렌즈에 새긴 제작자의 인장 역시 날조였다. 애인의 손에 낀 건틀릿도, 평범한 청동 건틀릿에 미세한 유리관을 삽입해서 자운의 바다에서 서식하는 자연발광 해조류를 유리관 안에 채워 넣었을 뿐이었다. 오로지 구부정한 남자의 등에 달린 호흡 보조 탱크만 진짜 마법공학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그의 충혈된 눈과 질기고 튼튼한 작업복의 차림새를 보아하니, 뼛속 깊이 자운인임이 분명했다.


그녀는 ‘시계학의 도로’를 벗어나 ‘유리 우물 길’로 접어들었다. 곧이어 ‘백 개의 술집 대로’, ‘항성의 도로’를 지나 인코그니아 광장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진델로가 발명한 거대한 지구의가 설치되어 있었다. 격자 세공이 되어 있는 그 구체형 구조물은 지난해에 진델로가 행방불명된 이후 작동이 중지되었지만, 주변은 여전히 모여드는 군중으로 시끌벅적했다. 발명가 지망생과 예술가, 오늘을 위해 여기까지 여행해 왔을 자운인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핼쑥한 낯빛의 자운인들은 한눈에도 기침에 시달린 기색이 역력했다.


기스베르트는 자기 고향인 자운이야말로 필트오버보다 먼저 진보를 이룩한 도시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자운에서는 진보의 날을 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고 했다. 필트오버에서 진보의 날은 ‘태양 관문’이 처음 열린 순간을 기념하는 경사스러운 날로, 이때만큼은 발로란의 동부와 서부간 교역이 무제한으로 허락된다. 그건 필트오버에서 그 교역에 처음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황금을 끊임없이 벌어들일 수 있게 된 것을 자축하는 뜻이기도 했다. 반면 자운에서 그날은 전혀 기쁜 날이 아니었다. 지각 변동으로 동서를 잇는 교역로가 생기기는 했지만, 자운의 한 지역 전체가 물에 잠겨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똑같은 날이지만 서로에게 그 의미는 이토록 달랐다.


타마라는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광장 저편에서 심부름꾼 여럿이 그녀 쪽으로 질주해 왔다. 공기 수송관 시스템을 통해 편지를 배달하러 가는 전령들이었다. 타마라가 그들을 재빨리 피해 길을 비켜주는데, 군중 가운데 문득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노아미 킴바. 그녀가 타마라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키스를 날려 보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킴바는 타마라에게 구애해온 여성이다. 둘은 여태까지 서늘한 저녁 공기 속에서 세 번 정도 만나 함께 어울렸다. 그때마다 킴바는 자기 품에서 밤을 함께 보내자고 했지만, 타마라는 너무 바빴다. 여유만 좀 생긴다면 다음번에는 수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타마라는 광장의 북쪽에 난 아치형 통로에 이르러, 때마침 통로에서 걸어 나오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턱수염을 기르고 금속 어깨받이와 투구로 무장한 남자였는데, 팔이 인조 기관으로 되어 있었다. 두 팔은 피스톤으로 작동하는 압축 공기식 기계 장치로 개조되어 기괴한 인상을 주었는데, 그것으로 타마라는 그가 ‘영광된 진화단’이라는 교단에 소속된 사제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그녀를 보고 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북적거리는 광장의 인파 틈으로 빠져나갔다. 신학과 공학과 마법의 힘을 혼합해 스스로의 신체를 강화한 열성 광신자. 타마라는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에 잠깐 눈길을 던지고, 등을 돌려 발길을 재촉했다. 이제 오블리크 거리를 쭉 따라가면 마법기계공학 다리가 나올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발걸음 수를 헤아리면서 걸어나갔다.


마법기계공학 다리 앞에 이르자 도시가 별안간 그녀의 눈앞에서 쩍 갈라졌다. 필트오버의 북부와 남부를 가르는 거대한 협곡이 나타난 것이다. 커다랗게 입을 벌린 땅의 균열은 마치 태곳적부터 그 자리에 있던 자연 지형처럼 보였지만, 실은 비교적 최근에 인공적인 힘에 의해 생겨난 균열이었다. 자연 원소를 지배하려는 인간의 자만과 욕심이 초래한 사건이다. 얼마나 대담한 계획을 밀어붙였길래 땅이 쪼개져 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일으켰는지, 거기에 들어갔을 어마어마한 의지력을 생각하면 경이로웠다. 자운의 절반이 파괴되어버린 것은 장래의 번영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였다.


드넓은 협곡 아래 자운의 마법기계공학 대학의 거대한 탑이 절벽 윗부분까지 자못 오만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탑은 협곡 사이를 가로지르는 현수교들과 두꺼운 철제 케이블들을 고정하는 역할을 했다.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치면 현수교와 케이블들이 현악기처럼 소리를 내곤 했다. 특히 강철과 석재로 만든 아치형의 중앙 다리가 명소였다. 필트오버의 두 지역을 오고 가는 사람들로 다리는 인산인해였고, 다리 한가운데에 와인 노점이며 과자 노점들이 잔뜩 늘어선 바람에 길이 막혀 빠져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다못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 사이 어젯밤 술이 아직도 안 깬 주정뱅이 몇몇이 순찰대원들에게 붙잡혀 끌려나가고 있었다. 순찰대는 푸른 재킷, 번쩍이는 부츠에 체크무늬 바지 차림이었다. 다른 도시에서 순찰대 제복이 저렇게 야단스러운 옷차림이었다면 우스꽝스럽게 여겼겠으나 여기서는 평범해 보였다. 타마라가 그쪽에 눈길을 주고 있자니, 술꾼들 근처의 누군가가 갑자기 불쑥 뛰어나왔다가 인파 틈으로 잽싸게 사라져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지만 타마라는 그 사람이 손가락에 면도칼 달린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소매치기였다. 오늘 저 술꾼 중 한 명은 집에 돌아가 술이 깨고 나면, 호주머니 안에 다 찢어져서 속은 텅텅 비어있는 지갑을 발견할 것이다.


도시의 북부에는 명문가의 대저택과 삼엄한 경비로 보호되는 공방 단지가 밀집되어 있었다. 지금 이 다리를 지나는 유동 인구는 대부분 그쪽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었다. 타마라의 주위에는 견습생들도 꽤 많이 보였다. 저마다 자기 발명품을 갓난아기처럼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타마라는 기스베르트나 콜레트가 이중에 있지 않을까 해서 둘러보았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얼굴을 제대로 분별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다리 앞까지 다다른 타마라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필트오버와 자운의 높이 차이가 너무 까마득했기 때문에 내려다볼 때 아찔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리로 들어가는 길 어귀의 양옆에는 로브를 걸친 동상 두 개가 버티고 서 있었다. 하나는 부, 하나는 정직을 상징하는 동상이었다. 타마라는 청동 부속품 하나를 꺼내서 첫 번째 동상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부속품의 무게에 의해 내부 장치가 작동하여, 동상이 저절로 손가락을 오므려 이를 감싸 쥐게 되었다. 동상이 다시 손을 펼쳤을 땐 부속품은 사라지고 없었다.


“저는 항상 반대쪽 동상한테 주는데.” 타마라 옆에 불쑥 나타난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검은 머리에 잘생긴 남자였다. 피부가 매끈한 걸 보니 돈이 많은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어젯밤에 마신 듯한 와인 냄새가 풍겼다. “나한테 ‘없는’ 거라야 돈 주고 살 가치가 있으니까요.”


타마라는 남자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도 남자는 부득부득 따라왔다. 숙취 때문에 신경이 무뎌진 것인지, 아니면 지갑에 돈이 너무 많아서 뻔뻔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이, 잠깐 기다려봐요. 그렇게 무례하게 굴 건 없잖아요, 아가씨.”


“이건 무례가 아닌데요. 저는 가야 할 데가 있고, 당신하고 이야기 나눌 생각이 없을 뿐이에요.”


남자는 킥킥 웃으면서 그녀를 따라 다리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를 도전할 대상으로, 황금의 마법 약간이면 살 수 있는 여자쯤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아하, 이제 보니 견습생이로군. 맞죠?” 그는 이제야 타마라의 옷차림과 가방을 알아본 듯 말했다. “시험 치러 가는 길이구먼? 숙련공 눈에 들어서 좋은 가문에 들어가야겠네요. 안 그래요?”


“그렇죠. 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녀는 대놓고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남자는 물러나긴커녕 아예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사들일 가축 한 마리를 평가하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꽤 예쁘장하게 생겼네, 좀 여위긴 했지만. 라카브로네 식당에서 몇 끼만 제대로 먹으면 금방 얼굴이 펼 거야. 어때요? 진보의 날이잖아요. 다들 재미 보는데 우리도 좀 놀죠. 응?”


“관심 없어요.” 타마라는 남자를 밀어젖히고 나아갔다. “치근거리지 말고 저리 좀 가요.”


“이봐요 아가씨, 내 이름은 켈라 알라브록서스라고 해요. 북부 지역을 주름잡는 거물 몇 명이 내 친구인데...” 남자는 그녀의 앞을 자꾸만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나하고 좀 어울려 주면 그들에게 당신 얘기를 좋게 해줄게요. 시험에서 조금 더 유리해지게 도와주겠다고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아뇨. 비키세요.”


타마라가 뻔히 예상한 대로, 남자는 그녀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손을 낚아채서 비틀어버렸다. 까딱하면 손목이 마른 장작처럼 부러질 뻔했다. 엄청난 힘이 실린 그녀의 기습 공격에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올렸다.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는 켈라 알라브록서스를 이끌고 다리 난간 쪽으로 건너간 다음, 허리 높이의 석조 난간에 그를 밀어붙였다. 여기가 얼마나 높던 타마라는 이제 무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가라고 좋게 말했잖아.” 그녀가 알라브록서스의 손목에 힘을 보태며 으르자, 그는 흑 하고 흐느낌을 토했다. “좋은 말로는 못 알아듣나 본데, 내 앞에서 꺼지라고. 안 그러면 여기서 확 밀어버린다. 그럼 너는 저 아래 땅속에 있는 자운 건물 옥상에 처박혀서 시체도 제대로 못 추리게 될 거야.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냥 술 취해서 실수로 떨어진 줄만 알 거고. 무슨 말인지 이해돼?”


그는 너무 아파서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나는 네 ‘좋은 말’이나 ‘도움’ 따위 필요 없어. 그딴 거 없어도 나는 원래 잘하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내 힘으로 직접 할 거야. 자, 이제 웃으면서 집에나 가. 한숨 푹 자고 술도 좀 깨고. 그리고 나중에 또 여자한테 무례하게 굴 마음이 들거든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도록.”


타마라가 마침내 손목을 놓아주자, 켈라 알라브록서스는 입을 떡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뭔가 한바탕 쏘아주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무언의 압박을 주자 재깍 수그러들었다. 마침내 알라브록서스는 아픈 손목을 감싸 쥔 채 온 길로 얌전히 물러났고, 타마라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눈을 돌렸다. 그때 차도 건너편에 모여 서 있던 소매치기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알라브록서스가 간 방향으로 고갯짓하자, 의중을 알아챈 그들은 곧장 그쪽으로 뛰어갔다.


“뭐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등 뒤에서 또 다른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타마라는 알라브록서스에게 지어 보였던 냉정한 표정을 순식간에 거두고, 환히 웃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기스베르트와 콜레트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웬 술꾼 하나가 수작을 좀 걸길래.”


“그나저나 너 늦었어. 저것 봐.” 기스베르트가 난간 너머 골짜기 밑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기계화된 시계탑 한 채가 서 있었다. 이 다리는 시계탑보다 한참 더 높은 곳에 위치했지만, 탑의 칙칙한 금속 표면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무슨 말이야? 저 시계탑은 멈춘 지 몇 년 됐잖아.”


“그야 그렇지.” 기스베르트는 짐짓 쏘아붙였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열띤 눈빛을 보면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시계탑의 그림자가 마법기계공학 탑을 지나기 전에 만나기로 약속했잖아.”


기스베르트가 마법기계공학 대학교 탑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탑의 그 구역에는 실험실이 모여 있어서, 벽에 꽂힌 통풍용 파이프들로부터 녹색 빛을 띤 회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그 모든 것 위로는 신비로운 시계탑 모양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저것 보라고.”


타마라는 미소를 지으며 기스베르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그는 타마라에게 느꼈을 일말의 서운함조차 사라진 듯 시선을 푹 떨구었다.


콜레트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리고는 말했다. “얼른 가자. 누구누구는 멍청해서 언니가 늦더라도 용서해주겠지만, 메다르다 가문은 안 그럴걸. 종이 세 번 치면 칼같이 대문을 닫아버릴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다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두 번째 종이 울렸단 말이야.”


메다르다 가문의 대저택은 이 다리의 북쪽 끝자락에서 멀지 않았지만, 거리가 워낙 붐비는데다 시험을 치려고 모여드는 다른 견습생들이 수두룩할 테니 서둘러야 했다.


“그래, 얼른 가자.” 타마라는 자신이 만든 장치가 들어 있는 가방을 들어올리고 툭툭 두드려 보였다. “빌어먹을 부자들에게 우리가 뭘 만들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자고.”


메다르다 가 대저택은 강철로 된 으리으리한 대문들과 높고 새하얀 석조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벼락에는 움푹 들어간 부분이 여럿 있었고, 거기엔 가문의 역대 유명 인사들을 묘사한 청동 반신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 가문의 수장인 야고 메다르다의 반신상도 있었다. 열린 대문들 앞으로 의욕에 넘치는 견습생이 몰려들어 줄을 섰다. 준비해 온 소중한 발명품으로 이 걸출한 집안과 계약을 맺고 싶어 다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도 예의를 차리며 다른 견습생의 작품을 망가뜨리지 않으려고 서로 조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입구에는 가문의 상징색이 들어간 옷을 입고 검과 창으로 무장한 사내들이 신청자들의 서류를 확인한 뒤 들여보내고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마라는 그들의 철저한 원칙주의에 감탄했다. 인장이 잘못 찍혔거나 날조한 서류를 가져와서 입장 거부를 당하는 견습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항의하지 않고 다만 어깨를 으쓱하며 순순히 발길을 돌렸다.


타마라, 콜레트, 기스베르트는 지체없이 통과되었다. 그들의 서류는 진작에 콜레트가 확실히 검토한 바 있었다. 콜레트는 셋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워낙 꼼꼼하고 세심했다. 장차 그녀의 앞날에 크게 도움이 될 성품이었다.


그들이 막 대문을 통과했을 때 필트오버 재무성에서 세 번째 종이 울렸다. 어쩐지 타마라는 목덜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수년의 경험으로 이런 종류의 직감을 신뢰하게 된 그녀는 즉시 멈춰서, 가방끈을 고쳐 메는 척 거리를 돌아보았다. 그때 거리 저편의 대리석 분수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필트오버의 보안관 재킷을 입고, 느슨하게 넥타이를 매고, 자기 식대로 맞춤 제작한 듯한 모자를 쓴 여자였다. 모자를 너무 깊이 눌러써서 이목구비가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서 그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은 채 견습생들을 쓱 훑어보고 있었다. 어깨에는 총신이 긴 라이플 한 자루를 얹었는데, 격자무늬로 세공된 은 구체 같은 것이 총에 달려 있었다. 구체 안에는 번쩍이는 보석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타마라와 눈이 마주치더니 재빨리 시선을 피해버렸다.


타마라는 저 눈빛을 알고 있다.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대문이 닫혔다. 홀로 뒤처진 타마라는 동료들을 따라잡으러 발길을 돌렸다. 콜레트와 기스베르트는 다른 견습생 스무 명 정도와 함께 한편에 몰려 있었다. 언뜻 단순한 마차처럼 생긴 물건을 바라보며 하나같이 입을 딱 벌리고 넋이 나가 있었다. 타마라도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그건 평범한 마차가 아니었다. 차체 밑에 마법공학 격납기가 달려 있었고, 금과 은 케이블로 차축의 앞쪽과 뒤쪽에 연결되어 있었다. 격납기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부드러운 빛을 보니 타마라는 혀에 찝찔한 맛이 고이는 느낌이었다.


“저건 자가 운전차야.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우베르티가 설계한 작품일걸.” 기스베르트가 말했다.


타마라가 받아쳤다. “그럴 리가. 우베르티는 카드왈더 가문에서만 일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아.”


콜레트의 말에 기스베르트는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공방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메다르다의 중개인들이 그녀의 설계도 사본을 하나 훔쳤다나 봐.” 콜레트는 나지막이 속닥거렸다. “뜬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일로 한바탕 잔혹한 살육극이 벌어졌대. 토레크 가문이 우베르티를 꾀어내려 하고 있지만, 카드왈더에서는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어.”


“뭐, 그야 당연하겠지.” 타마라는 대저택으로 들어가는, 광택제가 칠해진 검은 출입문을 열면서 말했다. “가문 수석 장인의 설계도를 도둑맞았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니, 그건 자기들이 약하다고 선언하는 꼴이잖아.”


그때쯤 긴 검은색 지팡이를 짚은 집사가 나타났다. 메다르다 가의 집사들의 상징과 같은 진홍색과 금색의 옷을 입은 그는 희망에 부푼 견습생들을 대기실 쪽으로 안내했다. 집사를 따라 저택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견습생들은 경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치형의 곁방들, 호화로운 응접실, 장엄한 회랑. 메다르다 가문의 막대한 부가 저택 전체에 여봐란듯이 전시되어 있다. 황금 액자에 끼운 초상화들이 벽 전체를 차지했고, 거대한 사암 조각상들은 괴수의 머리를 달고 있는 전사의 모습인데, 슈리마의 무덤에서 거금을 들여 직수입해 온 것이었다. 벽 곳곳에 십자로 교차시켜 장식해둔 무기들은 아이오니아풍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바닥 전체가 번쩍이는 대리석이고, 웅장한 계단은 프렐요드의 무쇠숲에서 공수한 나무들의 나선형 가지 부분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타마라에게는 이 저택의 모든 것이 손님들에게 위협감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위대한 메다르다 가문의 성취를 과시함으로써 사람들이 스스로 위축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저 위의 중이층 회랑에서 한 숙녀가 또 다른 집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 치렁치렁 내리뜨려진 잿빛 드레스에 진홍색 술 장식이 달린 외투를 차려입은 여자였다. 바닥을 또각또각 울리는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기묘하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견습생들을 내려다보고는 입술에 주름을 지으며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시야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견습생 일행은 마침내 대기실에 도착했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대기실의 바닥에는 빗살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한편에는 상아와 자개로 만들어진 시계가 놓여 있었다. 레벡이 설계한 그 시계는 메트로놈처럼 정확하게 시각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안쪽의 또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으리으리한 문이 있었다. 검게 옻칠이 된 문짝 표면에는 눈높이 위치에 뚜껑이 달려 있어서 견습생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지만, 그때 집사가 지팡이로 나무 바닥을 툭툭 두들기면서 모두 벽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제부터 호명되는 견습생은 시험장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연단 옆에 서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자신이 보여줄 발명품을 짧게 소개하십시오. 그리고 간략하게, 누차 강조하지만 ‘간략하게’, 그 작동 원리를 설명해야 합니다. 메다르다 가 소속 숙련공들이 심사를 할 것이니, 심사위원들이 여러분보다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고 임하세요. 답변은 가급적 짧게 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분들은 쉽게 싫증을 내시니까요. 성공하면 왼쪽 문으로, 실패하면 오른쪽 문으로 퇴장하십시오. 이게 전부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집사는 이제껏 다른 견습생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안내를 수없이 되풀이했겠지만, 그래도 건투를 빈다는 마지막 인사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타마라는 자기도 모르게 가방에 손이 갔다. 여기 든 이 작품이라면 반드시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꼭 오늘이 아니라 다른 날이라도,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필트오버의 명문가 중 한 군데쯤은 그녀를 반드시 영입하게 될 것이다. 타마라는 기스베르트와 콜레트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둘 다 초조해 보였고, 놀랍게도 타마라 역시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너무 오랜 시간을 진보의 날 시험 준비에 쏟아부은 탓인지, 마침내 마지막 허들을 넘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긴장감을 느끼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긴장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감각은 정신을 예리하고 선명하게 가다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기스베르트의 손을 잡고 꼭 힘을 주었다. 그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 맥없이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한편 콜레트는 꼿꼿이 앞만 쳐다보고 방 저편에 둘러앉은 견습생들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누가 합격하고 누가 낙오할지를 가늠하는 것이리라.


이윽고 검은 문에 달린 뚜껑이 열렸다. 모두가 숨을 죽였고, 문 저편에서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견습생들 가운데 한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불안한 발걸음으로 그쪽으로 걸어갔더니 문이 열렸고, 시험장 안으로부터 오래된 나무의 퀴퀴한 냄새와 열띤 분위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타마라는 시험장의 풍경이 어떨지 머릿속에 상상해 보았다.


두 번째로 호명된 견습생은 콜레트였다. 그녀는 결연히 일어나 숨을 길게 내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콜레트는 잘해낼 거야, 분명.” 기스베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너도 그럴 거야, 기스.” 타마라는 그를 격려했지만, 내심으로는 그가 불안감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기스베르트의 기량은 확실히 뛰어났지만, 자운 출신의 소년이 필트오버 명문가의 거대한 저택 안에서 시험을 친다는 건 아무래도 불리했다.


이후 나머지 견습생들도 차례차례 호명되었다. 일곱 명이 더 불려 들어가서 시험을 치는 동안 타마라는 틈틈이 시계를 확인했다. 시험 시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메다르다 가문의 숙련공들이 벌써 싫증이 난 건가? 순서가 뒤로 밀릴수록 불리한 걸까, 유리한 걸까?


기스베르트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의자에서 튀어 오르다시피 했다. 하마터면 가방을 떨어트릴 뻔하기까지 했다. 그는 가방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땀을 뻘뻘 흘렸다. 보다 못한 타마라는 그에게 조언을 했다.


“심호흡을 해. 네가 만들었으니까 스스로 훤히 잘 알잖아. 네 작품은 훌륭해.”


“정말로 훌륭해? 합격할 만큼?”


타마라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답과 다른 대답을 했다. “그럼.”


기스베르트는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이후 나머지 견습생들도 입실했고, 맨 마지막으로 타마라만 남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 혼자 있으려니 감시당하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이름이 불린 순간에는 차라리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으로 걸어갔다.


원형의 방이 촛대들 위에 둥둥 떠 있는 구체형 조명등으로 환하게 밝았다. 촛대는 횃불을 쥔 손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어, 마치 그 손들이 세상에 빛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타마라는 이렇게 뻔뻔스럽게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인테리어에 비웃음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방 안의 구조는 계단식 강의실 같은 형태로, 뒤편의 벽까지 계단식으로 늘어선 의자들이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단순한 목재 연단과 작업대가 놓여 있었고, 방의 좌우 벽에는 각각 문이 하나씩 나 있었다. 왼쪽 문은 성공, 오른쪽 문은 실패.


계단식 좌석은 적어도 백 명은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규모였지만, 지금 그녀 앞에 앉은 심사위원은 다섯 명뿐이었다. 남자 둘, 여자 셋. 모두가 숙련공임을 뜻하는 진홍색 로브를 걸쳤고, 커다란 명부를 펼친 채 금도금된 깃털 펜으로 저마다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사각사각 소리가 선명히 울리는 걸 들으니 방의 음향 효과가 좋은 모양이었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 모두 마법공학 강화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타마라가 보기에 가짜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다만 모두가 심사를 얼른 끝내고 싶어하는 기색만 역력했다.


“이름이?” 여자 심사위원 한 명이 고개를 들지도 않고 물었다.


“타마라 라우타리입니다.”


“시연할 발명품이 무엇이죠?” 이번에는 남자 심사위원이 물었다. 그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그물망을 댄 목 보조기를 통해 인공적으로 음성을 출력하고 있었다.


타마라는 가방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고 자신의 작품을 꺼냈다. 철사를 얽어서 정육면체 모양으로 배열하고, 그 한가운데에 산성 약품으로 조각을 새겨 넣은 구체가 들어 있는 형태였다.


“이 발명품의 이름은 마법 혼천의 증폭기입니다.”


“그 발명품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남자가 또 기계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타마라는 그 목소리에 내심 많이 초조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수정의 성질을 동력원으로 이용, 그 출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하여 이제껏 역사상 유례가 없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타마라는 무던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 말에 담긴 오만함은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심사위원들 전원이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견습생이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겠으나, 타마라처럼 자신감 넘치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의 호기심이 동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떻게 작동하지요?” 백발의 남자 심사위원이 물었다. 그는 보석 안구가 박힌 도자기 보강판을 얼굴에 이식한 상태였는데, 원래 피부에 남아 있는 화상 흉터가 보강판 밖으로 약간 드러났다.


“동력 수정의 기하학적 구조, 그리고 그것이 회전하는 축. 이 두 가지 요소가 결정적입니다.” 타마라는 구체에 달린 섬세한 뚜껑을 열고, 정밀하게 구현한 수정 고정 장치를 드러내 보였다. 값비싼 목걸이처럼 보이는 가느다란 체인이 그것이었다. “이 발명품은 회전의 속력과 각도를 판독함으로써, 수정이 낼 수 있는 최적의 동력을 산출하도록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인조 팔을 장착한 여자 심사위원이 한 마디 던졌다. 이제껏 학생들의 조잡한 발상이라면 이골이 나도록 들어보고 기각해온 교수답게, 그녀는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타마라를 꿰뚫을 듯 쳐다보고 있었다. “수정의 동력을 방출할 시간이 없으니 통제가 전혀 되지 않을 텐데. 프라빈도 2년 전에 똑같은 시도를 했다가 금광 구역의 절반을 날려 먹을 뻔했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든 안 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닐세, 견습생. 증명할 수 있나? 자네 이론을 입증할 수 있겠나?”


“입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믿음은 과학의 근거가 아니지.” 심사위원은 멋모르는 아이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실증적인 증거가 필요하네.”


“증거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심사위원은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시연해 보게.”


타마라 옆의 작업대 표면에 달린 뚜껑이 저절로 열리더니, 그 안에서 세공 장식이 된 받침대가 솟아올랐다. 그 위에는 조그마한 파란색 수정이 놓여 있었다. 수정은 그 자체의 내부에서 나오는 빛으로 아른아른 빛났다.


마법공학 수정.


기껏해야 타마라의 손톱만 한 크기의 수정이었지만, 그것 하나에 미래가 달려 있었다.


수정으로 필트오버 명문가들은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 그들 아니라 누구라도, 수정을 타마라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라면 누구든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타마라에게 주어진 이 수정은 남은 동력이 얼마 없었지만, 이 정도로도 헤아릴 수 없이 강력하고 귀중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이토록 아름다우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자, 그럼 한번 해보시오.” 화상 흉터가 있는 남자가 말했다. “우릴 매료시켜 봐요.”


타마라는 수정을 받침대에서 들어올렸다. 수정을 손에 쥐어 보니 예상한 것보다 훨씬 무거웠고, 느껴질까 말까 한 미세한 진동과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녀는 극도로 신중을 기해 수정을 발명품의 구체 안에 집어넣고, 섬세한 체인으로 그것을 고정했다. 그리고 확실히 고정되었는지 확인한 뒤 뚜껑을 닫았다. 정육면체의 윗면에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제어 장치가 달려 있다. 그녀는 작동의 기점이 되는 위치로 맞아 들어가도록, 안에서 맞물리는 부분들을 움직였다.


이윽고 장치의 전선관이 수정의 동력원을 감지하자 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안에서 부드러운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타마라는 증폭기가 작동되는 것을 지켜보며 씩 웃었다. 소음은 점점 더 커졌고, 동시에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쇠 맛도 점점 커져갔다.


소음이 듣기 싫을 만큼 요란한 굉음으로 증폭되면서 파도치듯 요동쳤다. 그런데 강의실 안에 켜진 조명구들이 그에 감응하여 파동을 일으켰고, 그 바람에 장치의 기초 부품 하나가 안에서 튕겨 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증폭기는 작업대 위에서 사방팔방으로 마구 움직이며 진동했고, 급기야는 구체 주위에서 파직파직 흘러다니던 에너지가 아예 장치의 윗면을 꿰뚫고 솟구쳐 올랐다. 아래에서 위로 번개가 거꾸로 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장치를 끄게, 라우타리 견습생!”


타마라는 장치에 손을 뻗었지만, 푸른 빛줄기가 그녀의 손등을 후려쳐 새빨간 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급속도로 과부하를 일으키는 증폭기로부터 움찔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못 하겠어요. 너무 빨리 증폭되고 있어요!” 타마라는 아연히 외쳤다.


이런 일은 진작 염두에 둔 것이었다. 타마라가 본래의 설계에서 변화를 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변화로 이렇게까지 파괴적인 참사가 일어나지는 않기를 바랐었다.


기계에서 푸른 불똥이 튀어 올라 천장으로 솟구치더니, 구체형 조명등 중 하나와 충돌했다. 그러자 조명등이 폭발하면서 눈 부신 빛의 분수가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조명등이 하나, 둘, 세 개가 박살 나 버리고, 끝내는 방 안에 남은 조명이라고는 오로지 타마라의 증폭기에서 뿜어 나오는 푸른 빛 하나만 남게 되었다.


사태가 그쯤 되자, 인조 팔을 한 여자 심사위원이 일어서서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바닥에서 금속판이 철컥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작업대 전체가 바닥 밑으로 꺼져 들어가 사라졌다. 바닥의 뚜껑 문은 즉시 다시 폐쇄되었고, 문틈에서 푸른 빛이 잠깐 새어 나왔지만 이내 바닥 밑에서 쾅 하는 둔탁한 소음이 메아리로 울리더니 그 빛마저도 사그라졌다.


“안전 설비가 된 방이었군요.” 타마라는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증폭기가 여기서 폭발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래, 라우타리 견습생.” 심사위원은 자리에 앉고 금색 깃펜을 집어 들었다. “인명피해를 끼칠 수 있는 발명품을 가져온 견습생이 자네가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겠네요.”


타마라는 실망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의도한 결과였다. 전문가로서의 자부심 때문에 너무 최선을 다하다 보니 본연의 목적을 해치려는 충동이 들기도 했지만.


인조 안구를 장착한 남자 심사위원이 명부에 뭐라고 적어 넣고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어느 문으로 나갈지는 알고 있겠지요?”


타마라가 메다르다 가문의 저택에서 나가는 길은 들어왔던 길보다 훨씬 수수했다. 시험장의 오른쪽 문밖으로 나서자 휑한 석재 통로가 나왔고, 그 통로는 지하로 쭉 이어지다가 강철 출입문에 이르렀다. 문 앞에는 포위 작전도 견딜 만큼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병사들은 차라리 진압군에 가까웠는데, 마법 압력식으로 강화된 팔과, 헬멧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몸을 강화한 상태였다. 그들은 타마라가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문을 탕 닫아버렸다.


출입문 밖으로 나오자 도시에서 더 남쪽으로 이어지는 옆길이 펼쳐졌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협곡에 이를 것이다. 자운도 아니고, 완전히 필트오버라고도 할 수 없는 곳. 크기와 모양이 들쭉날쭉한 조약돌로 포장된 골목길에는 자운에서 뻗쳐오는 녹색 안개가 공기 중에 낮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다 쓰러져가는 벽돌담 앞에 주저앉은 기스베르트가 눈에 띄었다. 그의 발치에는 박살이 나버린 발명품이 팽개쳐져 있었다.


기스베르트가 그녀를 보고는 미소 지었다. “잘 안 됐어?”


“제대로 안 됐어.”


“어땠길래?”


“폭발했어.”


기스베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소리 내어 웃고는 황급히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아, 미안. 웃으면 안 되는데. 폭발했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히죽 웃었다. 그러자 기스베르트는 또 웃었다.


“그래도 내 건 터지지는 않고 조각조각 허물어지기만 했으니 다행인가? 뭐, 그게 무슨 대수겠어. 어차피 메다르다 가문 분들께서 자운인 따위를 신성한 자기들 세계에 끼워줬을 리도 없었겠지!”


타마라는 그의 자조적인 말을 못 들은 척 넘기고 화제를 돌렸다. “콜레트는 못 봤어?”


기스베르트의 눈빛이 밝아졌다.


“못 봤어. 성공했나 보다.”


타마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적어도 우리 중 한 명은 합격했네. 그럼... 우리는 슬픔이나 달래러 갈까? 어쨌든 진보의 날이잖아. 박식하신 숙련공 선생님들을 날려버릴 뻔했다는 것도 성과라면 성과지.”


그때 길 저편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빛을 등진 어떤 호리호리한 여자의 실루엣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선두에 선 여자의 부하들인 것 같았다. 앞장서는 여자는 긴 라이플을 어깨에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는데, 그 총부리는 흔들림 없이 딱 한 곳만을 조준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타마라의 머리를.


아까 광장에서 보았던 그 보안관이었다.


“미안하지만, 라우타리 견습생, 술 마시는 건 다음 기회로 미뤄둬야 할 것 같군요.”


기스베르트는 항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보안관과 그 부하들은 타마라를 우격다짐으로 끌고 갔고, 기스베르트는 차마 그녀를 따라올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다행이었다. 타마라는 그가 이 일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다. 보안관 일행은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협곡까지 질질 끌고 갔다. 이러다가 저들이 벼랑 너머로 그녀를 던져버리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는 필트오버이니 그럴 일은 없었다. 필트오버는 법치주의 국가다. 고향이었다면 그녀는 이미 칼을 맞았거나 협곡 아래로 던져져 허공을 곤두박질치는 중이었을 것이다.


일행은 거대한 케이블카로 향하는 벼랑을 따라서 구불구불 뻗은 좁은 길로 움직였다. 이쪽으로 쭉 가면 도시의 해안에 늘어선 분주한 부두들로 이어진다.


“저를 체포하는 건가요? 제가 뭘 잘못했죠?” 타마라가 물었다.


보안관이 되물었다. “맙소사, 이제 와 모른 척 시치미를 떼시겠다는 건가? 우린 이미 당신 방에서 모든 걸 찾아냈어요. 마법공학 학술지들도, 설계도도.”


“저는 견습생인데요. 설계도는 당연히 있어야죠.”


그들은 저 아래의 바다와 부두로 뻗어 내려가는 레일 위에 설치된, 철망으로 된 플랫폼에 이르렀다. 드넓은 해협에는 선박 수백 척이 빽빽이 정박해 있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바닷길을 열어줄 ‘태양 관문’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 위에 드리워 있었다. 어떤 배들은 그냥 지나가는 선박이지만, 필트오버와 자운에 수출하는 화물들을 분주히 내리는 외국의 상선들도 많다. 프렐요드의 쇄빙선, 녹서스 함대의 바크형 범선, 슈리마의 갤리선, 심지어 빌지워터 도둑들의 은신처에서 온 것 같은 수상쩍은 선박도 몇 척 있었다.


필트오버의 군함들이 모든 것을 감시하고 있다. 흑단의 미끈한 선체에는 배를 젓는 노들, 그리고 적을 공격하기 위한 뾰족한 충각들이 돌출되어 있었다. 타마라는 그 배들이 노 젓는 선원의 힘뿐만 아니라 강력한 마법공학 무기를 동력으로 해서 움직인다는 소문도 들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사실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보안관의 부하 세 명이 타마라를 엘리베이터로 집어넣었다.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아프게 그녀를 붙잡고 압박하고 있었다.


“단순한 설계도가 아니라, 필트오버의 상세한 지도까지 필요한 견습생은 흔치 않을 것 같은데요. 나는 케이틀린 보안관이에요. 헤아리기 귀찮을 만큼 오랜 세월을 순찰하고 다녔으니, 이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구보다 잘 알죠. 그런 내가 보아도 당신이 만든 지도는 정말 훌륭하더군요. 그 자료라면 바이도 눈가리개를 한 채 필트오버를 누비고 다닐 수 있겠던 걸요.”


케이틀린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레버를 잡아당겼다. 엘리베이터가 덜덜 진동하면서 도시의 최하부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타마라가 대꾸했다.


“아, 그래요. 남의 말을 이해하기보다는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게 당신 성향에 맞겠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보안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타마라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기요, 저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녀는 가슴을 들썩거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요. 저는 그냥 시험 끝내고 한숨 돌리고 싶었던 견습생일 뿐이에요. 아버지에게 받은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메다르다 가문과 계약을 맺고 싶었는데... 그래야 자운의 화학 공장에 취직할 수 있단 말이에요. 정말이에요!”


모두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타마라는 거듭 애원하고 사정했지만, 보안관도 부하들도 묵묵부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부둣가에 멈추고 문이 열리자, 거대한 슈리마 갈레온 선박 한 척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배 앞에는 곡식 포대나 화물 따위를 운반할 때 쓰는 철제 수레가 있었는데, 그 위에 농산품 대신 타마라의 소지품이 올려져 있었다. 그녀의 학술지와 설계도들, 몇 달간 공들여 작업해온 결과물이 너덜너덜 찢어진 채 쓰레기처럼 처박혀 있었다. 기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걸 보니 뭐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타마라는 자신을 붙잡은 남자들을 뿌리치고, 케이틀린 보안관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전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제발요, 보안관님!”


타마라는 흐느껴 울었지만, 케이틀린은 그녀를 무시하고 수레 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근처를 지나던 일꾼을 불러서 그가 피우던 담배를 건네받더니, 수레에 쌓인 종이 뭉치에 담뱃불을 놓았다. 기름에 흠뻑 젖은 책과 두루마리가 펑 하는 소음과 함께 불길에 휩싸였다. 불은 순식간에 모든 걸 집어삼키고, 불과 몇 분 만에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다. 타마라는 자신이 기울인 모든 노력이 한 줄기 회색 연기로 변해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걸 망연히 지켜보다가, 케이틀린의 발치에 침을 퉤 뱉고 외쳤다.


“빌어먹을, 평생 잿빛 대기에나 파묻혀 살아라!”


케이틀린이 타마라를 자기 발치로 끌어당기며 대꾸했다. “제법이네. 당신의 우리말 억양은 꽤 그럴싸해요. 그것 하나는 인정해주죠. 적당히 거칠게 말할 줄도 알고, 비속어도 섞어 쓰고... 하지만 나는 이 도시의 밑바닥부터 최상층까지 온갖 사람들의 말투를 다 들어봤는데, 당신 말씨는 그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요. 알겠어요? 당신네들 특유의 앙심과 거무튀튀한 그을음이 너무 많이 섞여 있단 말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는 필트오버에서 나고 자랐어요. 저는 ‘황금의 처녀’라고요. ‘천공의 금고’가 보이는 데에서 태어났다고요! 거짓말 아니에요!”


케이틀린은 진력이 난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당신 억양은 유창하지만, 그래 봤자 녹서스인의 거만한 속내는 가려지지 않아.” 케이틀린은 타마라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가며 자기 말을 강조했다. “당신 정체가 뭔지는 뻔히 알아요. 적국에 숨어들어서 염탐하는 워메이슨 이야기는 나도 진작부터 들었으니까. 적국의 영토를 파악하고, 습격할 경로를 계획하고, 침공에 필요한 기초 작업을 하고...”


타마라가 뭐라고 항변하기도 전에, 케이틀린의 부하들이 그녀를 갈레온 선박의 입구로 끌고 갔다. 안에서 타마라를 맞이한 사람들은 살갗이 거무스름한 슈리마 출신 자객들이었다. 은 부속품 반 닢에 자기 할머니도 팔아 치워버릴 냉혹한 살인자들.


“두 번 다시 필트오버에는 발도 들이지 마시길.” 케이틀린이 자기 라이플을 팔로 안아 들며 말했다. “또 내 앞에 나타나면 그땐 머리에 총알을 박아버릴 테니. 알아들었지?”


타마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케이틀린의 말이 진담이라는 건 분명했다. 케이틀린은 선장을 불러 지시했다.


“그녀를 데려다가 아무 데나 버려. 벨준이든 어디든, 어디 험난한 곳에다. 아니면 충분히 먼 바다로 나가서 배 밖으로 밀어버려도 상관없다.”


타마라는 배가 해안가에서 멀리 벗어났을 때에야 갑판 위로 올라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헤엄쳐서 육지까지 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겠지만, 어차피 타마라는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필트오버의 풍경이 지평선 너머로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곳을 떠나게 되니 애석했지만, 그래도 임무가 마침내 끝나서 후련하긴 했다.


정교하게 만든 설계도와 지도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게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위험 부담은 진작 감수했다.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으니 그런 건 언제라도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타마라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신이 머릿속에 통째로 외워둔 필트오버의 지도를 떠올렸다. 밤마다 필트오버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보았던 지형지물들, 발걸음 수를 헤아리며 걸었던 골목길과 교차로, 도로들.


자신이 무슨 단서를 남겨서 케이틀린에게 발각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 보안관은 확실히 영리했지만, 타마라를 찾아낸 장본인은 케이틀린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타마라는 초조했다. 녹서스의 첩자를 밝혀낼 수 있을 만큼 영악한 자가 필트오버에 있다니.


그게 누구든, 그자가 녹서스의 ‘워메이슨 비밀 조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던 간에, 그래도 딱 한 가지 사실만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워메이슨 첩자들은 반드시 짝을 지어서 행동하며, 그중 한 명이 적국에 더 깊이 침투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희생시키기도 한다는 사실.


타마라는 빙긋 웃었다. 콜레트가 메다르다 가문의 심장부에서 얼마나 귀중한 정보들을 캐낼지 상상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빈 곡식 자루들을 쌓아 만든 침대에 몸을 눕히고, 마음 편히 잠에 들었다.



출처 : 리그 오브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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