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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NG/LOL

[LOL 단편소설] 블라디미르 - 삶은 예술이다

by Captain Jack 2018. 12. 29.

 

[LOL 단편소설]

   

  

   

블라디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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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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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의 밤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제국 전역에서 온 수천 명의 사람을 한곳에 몰아넣고 조용하기를 바랄 수 없는 것.


물가에 있는 자가야 족의 거주지 천막에서 사막 행군 노래가 흘러나왔고, 근처에 있는 청산업자의 경기장에서는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벽 울타리에 갇힌 용 사냥개들은 북쪽 도축장에서 도살된 가축의 냄새를 맡고 울부짖었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 비탄에 빠진 어머니, 악몽에 시달리는 퇴역 군인들의 절규는 술 취한 병사들의 고성이나 어둠 속에서 물건을 쌓아놓고 파는 행상인들의 외침과 하나가 되어 매일 밤 울려 퍼졌다.


결코, 녹서스의 밤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이곳만 제외하고.


녹서스의 이 구역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마우라는 소음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붓과 물감, 목탄 꾸러미를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결코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거리 한복판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릴 정도로 소음은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이 거리는 모르토라 또는 철의 관문이라고 알려진 녹서스의 오래되고 부유한 구역에 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도로의 울퉁불퉁한 자갈에 비친 보름달 빛은 마치 수십 개의 눈이 쳐다보는 것 같았고, 길 양쪽에는 숙련공이나 어쩌면 전투석공의 솜씨로 보이는 석조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마우라는 골목길 끝에 있는 높은 신전을 바라봤다. 갑옷을 입은 세 명이 기둥으로 장식된 아치형 구조물 안에 있는 흑요석 늑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마우라는 걸음을 재촉했다. 검을 지니고 어둠 속에서 기도하는 자들의 이목을 끌어 좋을 건 없었다.


밤중에 나와서는 안 됐다.


타흐보가 가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마우라는 그의 눈에서 간악함을 봤고 그가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질투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타흐보는 항상 자신이 동료들 중 가장 실력 있는 화가라고 믿었다. 이번 의뢰에 자신이 아닌 마우라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타흐보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빳빳하게 접힌 우아한 필체의 편지가 그들의 공동 화실에 도착했을 때 세리스와 콘라드는 신이 나서 마우라에게 가능한 한 모든 걸 기억해 오라고 애원했고, 주르카는 붓을 잘 씻어 두라고 했다.


"그분과 말을 나눠야 할까?" 세리스가 물었다. 마우라는 밤을 알리는 종소리가 항구에 울려 퍼지자 문을 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마우라에게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초상화를 그려야 할 테니 그래야겠지." 마우라는 어두워진 하늘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어떤 화풍을 원하는지 의논해야 할 거야. 더구나 자연광이 없을 테니까."


"한밤 중에 초상화라니, 참 이상하지?" 말똥말똥하게 눈을 뜬 콘라드가 담요를 망토처럼 두른 채 말했다.


"어떤 목소리일지 궁금하다." 세리스가 덧붙였다.


"다를 거 없어." 타흐보가 몸을 돌리고 낡아 떨어진 베개를 정리하며 쏘아붙였다. "그자는 신이 아니야. 그냥 사람이라고. 이제 다들 조용히 좀 할래? 잠 좀 자자."


세리스가 마우라에게 달려와 입을 맞췄다. "잘 다녀와." 세리스는 킬킬거렸다. "돌아와서 우리에게... 전부 다 말해 줘.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야기든지 간에."


마우라의 미소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새로운 후원자의 저택으로 가는 길은 유달리 구체적이었다. 단순히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까지 가는 정확한 경로가 말이다. 마우라는 수도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굶주림에 시달렸을 때 며칠 동안 거리를 떠돌았기 때문이다. 주문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아 세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화실 주인이 그들을 쫓아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우라에게 이 구역은 갈수록 수수께끼였다. 물론 이곳에 그 저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가 본 이는 얼마 되지 않겠지만, 모든 녹서스인은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다. 마우라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정복지의 낯선 도시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거리는 낯설게 느껴졌고 갈수록 좁고 험했다. 그러다 결국 몸을 으스러뜨릴 때까지 좁아질 것 같았다. 마우라는 경계등 혹은 밤에 찾아오는 구혼자를 위해 위층 창가에 켜 둔 양초의 희미한 불빛이라도 간절히 바라며 불안한 정적 속을 서둘러 지나갔다.


하지만 달 이외에 빛은 없었다. 뒤에서 자박거리는 발소리나 가쁜 숨소리 같은 것이 들리자 마우라의 심장박동과 발걸음이 빨라졌다.


확 꺾이는 모퉁이를 돌자 원형 광장이 나왔다. 중앙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분수대가 있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살 정도로 비좁은 이 도시에서 이런 광경은 거의 들어 본 적도 없을 만큼 사치스러웠다.


마우라는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분수대를 빙빙 돌며 중앙에 조각된 장식물의 사실성에 감탄했다. 조철을 두드려 만든 이 장식물은 두꺼운 갑옷을 입고 징이 박힌 철퇴를 쥔 머리 없는 전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조각상의 목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우라는 조각상이 누구를 나타내는 것인지 깨닫고 오싹해졌다.


서둘러 분수대를 지난 마우라는 붉은 무늬의 검은 대리석 벽에 세워진, 잘 말린 은빛목으로 만든 대문으로 향했다. 편지에 쓰여 있듯이 대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마우라는 묵직한 대문 사이에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택은 마우라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옅은 색 돌로 지어져 있었다. 녹서스의 많은 웅장한 구조물이 종종 그렇듯 획일적이지 않으면서 인상적이었다. 오히려 자세히 살펴볼수록 하나의 특정한 양식을 고수한 게 아니라 수 세기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 건축 유행을 한데 모아둔 듯했다.


그중 가장 특이한 건 본관 위에 솟아 있는 거친 석탑이었는데, 유일하게 이곳과 동떨어져 보였다. 석탑은 저택이 고대 주술사의 은신처를 둘러싸고 지어진 듯한 인상을 주었다.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마우라는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저택의 모든 곳에서 제국의 지난날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저택의 창문은 가려져 있어 아무런 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마우라에게 보이는 유일한 빛은 탑의 꼭대기에서 빛나는 은은한 진홍색 빛뿐이었다.


마우라는 자갈길을 따라가며 정성스럽게 가꿔진 아름다운 정원과 잘 나 있는 수로, 이국적인 향과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색을 지닌 낯선 꽃 사이를 지나쳤다. 바깥에 있는 널찍한 광장과 함께 엄청난 부가 엿보였다. 이번 의뢰에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생각에 마우라는 온몸에 기쁨의 전율을 느꼈다.


특이한 무늬의 날개를 지닌 알록달록한 나비 수백 마리가 꽃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한없이 가볍고 연약하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존재로 탈바꿈하는 생명체. 마우라는 한 번도 밤에 나비를 본 적이 없었다. 나비 하나가 손바닥 위에 내려앉자 즐거움에 웃음을 터뜨렸다. 끝이 가는 나비의 몸체와 쭉 뻗은 날개의 무늬가 녹서스 깃발에 그려진 날개 모양의 도끼날 문장과 이상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나비는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마우라는 나비가 빙빙 돌다가 다른 나비들과 함께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보며 희귀하고 아름다운 생물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마우라는 손가락으로 알록달록한 잎을 쓸고 지나가며 달빛에 반짝이는 먼지 속에서 손끝에 달라붙어 떠오르는 향기를 음미했다. 그녀는 그중 유난히 아름다운 꽃 옆에서 멈췄다. 불타는 듯한 붉은 꽃잎이 숨 막힐 정도로 밝은 빛을 내뿜었다.


슈리마의 진사 염료나 필트오버의 오커 염료를 섞어도 이런 광채를 지닌 붉은색은 얻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값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아이오니아의 주홍 염료도 이 꽃에 비하면 칙칙해 보일 정도였다.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아랫입술을 깨문 마우라는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꽃에서 꽃잎 몇 장을 떼어 냈다. 그 순간 남아 있는 꽃잎들이 안쪽으로 말려들었고, 줄기는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마우라로부터 멀리 휘어졌다.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 마우라는 혹시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지 몰라 저택을 올려다봤지만 창문은 여전히 어둡게 닫혀 있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마우라는 문턱에서 멈춰 섰다. 편지에는 들어오라고 적혀 있었지만, 막상 이곳에 오니 이상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혹시 이건 자신을 어떤 끔찍한 운명에 빠뜨리기 위한 함정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기엔 함정은 쓸데없이 정교해 보였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마우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두려움으로 망칠 수는 없다며 자책했다.


마우라는 숨을 들이쉬고 문턱을 가로질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관은 짙고 굵은 목재가 아치형 구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사이의 공간에는 제국 초기의 피비린내 나는 시절을 그린 색 바랜 벽화가 있었다. 마우라 양쪽의 넓은 통로 안으로 보이는 긴 화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누가 혹은 무엇이 전시되어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길게 휜 계단은 중간층과 넓은 아치형 통로로 이어졌지만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삼각대 위에 놓인, 천이 드리워진 큰 캔버스 같은 것을 제외하면 현관은 텅 비어 있었다. 마우라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지 궁금해하며 조심스럽게 가려진 캔버스로 다가갔다.


마우라는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이곳의 빛은 초상화를 그리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오늬무늬 바닥에 달빛이 고인 공간은 환했지만, 이를 제외한 구석은 마치 빛이 다가가기를 거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완전히 어두웠다.


"저기요?" 마우라의 목소리가 현관에 울려 퍼졌다. "편지를 받고 온…"


마우라의 말이 울렸다. 마우라는 한밤중에 이 기이한 저택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저기요? 아무도 없나요?"


"여기 있다."


마우라는 움찔했다. 교양 있고 남자다우며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위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숨을 죽이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우라는 몸을 돌려 그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블라디미르 님이신가요?"


"그렇다." 그는 그 이름 자체가 고통의 근원이기라도 한 듯 깊은 우울에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대가 그 화가로군."


"네, 맞아요." 마우라는 덧붙였다. "화가, 마우라 베체니아라고 해요."


그녀는 그의 마지막 말이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신을 꾸짖었다.


"좋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편지에 항구의 종이 울릴 때까지는 출발하지 말라고 적혀 있어서요."


"그랬지. 하지만 정확히 제시간에 도착했다." 이번에 마우라는 그림자의 깊은 어둠 속에서 은빛을 본 것만 같았다. "잘못은 그대 같은 이를 찾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한 내게 있겠군. 허영심은 우리 모두를 바보로 만들지, 안 그런가?"


"허영심이라뇨?" 마우라가 물었다. 그녀는 부유한 후원자들이 아첨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님의 진실한 모습을 담을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요?"


위쪽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내려 왔다. 마우라는 그가 자신의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건지 혹은 자신을 조롱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매번 그와 비슷한 말을 듣곤 하지."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사실 그런 순간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 그래, 내 정원은 마음에 들던가?"


그 질문에 놓인 함정을 감지한 마우라는 잠시 망설인 후 대답했다.


"네, 녹서스 땅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꽃들이 자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렇겠지." 블라디미르가 씁쓸하게 말했다. "이렇게 메마른 땅에서는 널리 퍼져나가 다른 것들을 몰아낼 만큼 억센 종자밖에 자라지 않아. 그것들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 그 붉은 꽃은 밤맞이꽃이었다."


마우라는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지만 블라디미르는 그녀가 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밤맞이꽃은 한때 보기 드문 아름다움과 계몽의 축복을 받은 동쪽 열도에 자생했지. 난 모든 필멸의 운명이 그렇듯 그곳이 멸망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네. 한때 타고난 자연의 원기를 받으며 자라던 숲에서 발로란으로 씨앗을 가져온 나는 피와 눈물을 섞어 밤맞이꽃을 피울 수 있었지."


"피라면... 그 정도로 땀 흘려 길렀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대는 꽃을 기르는 데 땀이 무슨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마우라는 답하지 못했지만 듣기 좋은 그의 억양은 매혹적이었다. 밤새도록 들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마우라는 비단결 같은 블라디미르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떨치고 가려진 캔버스를 향해 고갯짓했다.


"저기에 그리면 될까요?"


"아니."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저건 내 첫 번째야."


"무슨 첫 번째요?"


"내 첫 번째 삶." 마우라가 천의 가장자리를 들어 올리자 그가 말했다.

  


    

림은 시간이 지나 희미해져 있었다. 색은 빛에 바랬고 붓 자국은 밋밋해졌다. 하지만 그 상은 여전히 강렬했다. 막 성년에 들어선 듯한 젊은이가 예스러운 청동 갑옷을 입고 무시무시한 낫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었다. 세부적인 묘사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소년의 파란 눈만큼은 아직도 날카롭게 빛났다. 대칭을 이루는 뛰어난 외모, 살짝 고개를 기울인 모습이 마우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우라는 몸을 숙여 그 뒤에 있는 군대의 모습을 살펴봤다. 거대한 전사 무리는 인간이라기엔 너무 컸고 진짜라기엔 너무 괴물 같았다. 전사들의 윤곽과 특징은 세월이 흘러 희미해져 있었고, 마우라는 세월의 작은 배려에 감사했다.


"블라디미르 님인가요?" 마우라는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 초상화를 설명해 주길 바라며 물었다.


"한때, 아주 오래전 일이지."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마우라는 그의 말이 차가워 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 사라진 왕국의 버림받은 후계자였다. 신들이 서로 전쟁을 일으키던 시대였지. 필멸자들은 전 세계에 걸쳐 벌어지는 신들의 싸움에서 노리개에 불과했고 내 아버지는 살아 있는 신에게 무릎을 꿇을 때가 되자 나를 왕족 인질로 넘겼다. 내 목숨이 위태로울수록 아버지의 충성이 보장될 테니까. 아버지가 새로운 주군의 신뢰를 깨면 난 죽을 운명이었지. 하지만 아버지의 약속이 항상 그랬듯이 그것도 헛된 약속이었어. 아버지는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바로 그해에 신과의 서약을 어겼다."


블라디미르의 이야기는 한밤중 화실 지붕 위에서 다 함께 무서운 이야기를 나눴을 때 콘라드가 들려줬던 슈리마 신화처럼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콘라드의 이야기는 은근한 교훈극이었지만 이건… 진실의 무게가 담긴, 감상에 젖지 않은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 새로운 주군은 날 죽이는 대신 더 재미있는 걸 생각해 냈지. 적어도 그에게는 재미있었을 거야. 그는 내게 그의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의 왕국에 대항할 기회를 주었고 난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난 아버지의 도시를 파괴하고 아버지의 머리를 주군에게 바쳤지. 나는 끈에 묶인 훌륭하고 충직한 사냥개였다."


"당신의 백성을 직접 파멸시켰다고요? 어째서죠?"


블라디미르는 마우라가 진지하게 묻는 것인지 가늠이라도 하듯 잠시 말을 멈췄다.


"신성전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왕국은 절대 나의 것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에게는 아들과 후계자가 넘쳐났지.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차례가 돌아 오지 않을 만큼."


"그 주군이라는 자는 왜 그랬던 거죠?"


"난 그가 내 안에서 번득이는 위대함이나 단순한 필멸자 이상의 잠재력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지." 블라디미르가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자 마우라의 등줄기에 따스한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그저 자신의 사냥개 중 하나에게 재주를 가르치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 사기꾼이 아둔한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원숭이에게 좌판 주변을 돌며 춤추는 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마우라는 그림 속에 있는 젊은이의 모습을 되돌아봤다. 이제는 그 눈의 깊은 곳에서 뭔가 어두운 것이 도사리는 게 보였다. 잔인함 혹은 지독한 쓰라림이 번득이는 것도 같았다.


"그가 뭘 가르쳤죠?" 마우라가 물었다. 마우라는 자신이 그의 대답을 원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만큼 왠지 꼭 알아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군의 종족에게는 죽음을 거역할 힘이 있었다. 살과 피, 뼈를 가장 경이로운 형태로 빚을 수 있었지." 블라디미르는 말을 이었다. "내게 그들의 기술을 가르쳤다. 그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쉽게 휘두르던 마법이었지. 하지만 나는 가장 간단한 주문을 숙달하는 데도 내 지성과 의지를 전부 끌어모아야 했다. 나중에 그들의 비밀을 필멸자에게 가르치는 것이 금지된 행위이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종족의 관습을 무시하는 것을 즐기는 자였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블라디미르의 웃음소리가 마우라의 주변을 울렸지만 그 소리에 즐거운 기색은 없었다.


"관습에 저항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거야. 결국 그로 인해 파멸하고 말았지만."


"죽었나요?" 마우라가 물었다.


"그렇다. 그의 종족 중 하나가 배신하자 이 세계를 지배하던 그들의 힘이 무너졌다. 적들이 단결해 그에게 맞서자 내가 군대를 이끌어 자신을 지켜주길 바랐지. 하지만 난 그를 죽이고 그 힘을 들이켰다. 그가 수년간 내게 가한 수많은 가혹 행위를 잊을 수 없었으니까. 그의 목숨을 거둠으로써 난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여정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빌어먹을 능력 하나에 축복과 저주가 모두 깃들어 있었지."


마우라는 블라디미르의 어조에서 기쁨과 함께 슬픔을 느꼈다. 마치 그 일이 그의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처럼. 그는 죄책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단순히 마우라의 감정을 조종하려는 것일까?


그를 볼 수 없는 만큼 그의 의도를 가늠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아주 중요한 그림이긴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의 한 조각일 뿐이라네. 그림을 통해 '이 몸'을 영원히 남기려면 지금껏 지나온 다른 삶들도 미리 알아야 하지 않겠나."


마우라가 계단을 향해 돌아서자 그 위를 덮고 있던 그림자가 검은 조류처럼 부드럽게 물러났다. 이 거대한 저택에서 방금 자신의 아버지와 괴물 같은 스승을 살해했다고 인정한 자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마우라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지금 망설이는 건가? 그대는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난 이미 내 영혼의 많은 부분을 그대에게 드러냈지."


마우라는 그가 자신이 계단을 올라가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만으로 이곳을 떠나 친구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두려운 만큼,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의 관심과 시선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짜릿했다.


"이리 오도록."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도록 해. 그래도 부담스러워 떠나고자 한다면 막지 않겠다."


"아니요." 마우라가 말했다. "모든 걸 알고 싶어요."

     


    

간층에 있는 아치형 통로는 검은 석재로 지어진 넓은 복도로 이어졌다. 심장이 멎을 정도로 추운 곳이었다. 검은 벽에는 옻칠이 된 목판이 줄줄이 고정되어 있었다.


목판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나비 수천 마리가 박제되어 있었다.


슬픔이 마우라를 스쳤다. "이게 뭐죠?"


"내 수집품 중 하나지." 블라디미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 동시에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마우라를 앞으로 이끌었다.


"왜 나비를 죽인 건가요?"


"연구하기 위해서지. 왜겠나? 나비의 생은 아주 짧지. 그 생을 조금 더 빨리 끝낸다고 해도 아쉬울 건 없어."


"나비도 같은 생각일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죽음으로 얻은 결실을 보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대가 정원에서 본 나비들. 그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내가 빚어냈기 때문이지. 내 뜻과 지식으로 종 자체를 창조한 것이라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나는 신들처럼 어느 것을 죽이고 살릴지 선택할 수 있으니까."


마우라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란 날개 부분에 선명한 진홍색 원들이 그려진 나비였다. 마우라의 손가락이 나비의 몸체에 닿자 날개가 산산조각이 나더니 나머지 몸체도 아주 오래되어 벗겨지는 칠감처럼 바스러졌다.


차가운 바람이 살랑이며 마우라를 지나쳤다. 고정된 표본들이 폭포가 휩쓰는 것처럼 차례로 바스러지자 놀란 마우라는 뒤로 물러섰다. 수십, 수백 마리의 나비가 바스러져 땔감을 쌓은 모닥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씨와 재처럼 공중에 흩날렸다. 마우라는 얼굴에서 가루를 털어 내기 위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비명을 지르며 내달렸다. 가루가 옷 안으로 들어가자 따가웠다. 입에서 곤충의 잔해가 느껴져 침을 뱉었다. 귓속에도 가루가 들어간 것 같았다.


소리와 빛이 달라진 것을 느낀 마우라는 멈춰서 눈을 떴다. 얼굴에서 가루를 털어내자 넓고 둥근 방이 눈에 들어왔다.


마우라는 얼굴과 옷에 남은 가루를 털어내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평정을 되찾았다. 방의 벽은 원시적으로 잘린 돌로 지어져 있었다. 마우라는 자신이 그 오래된 탑 아래에 서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울퉁불퉁한 계단이 안쪽 벽을 따라 나선형으로 휘감겨 올라갔고 높은 곳 어딘가에서는 이상한 붉은빛이 아른거리는 막이 되어 내리비쳤다. 공기는 마치 제국의 갑옷과 무기를 쉴새 없이 만들어내는 대규모 대장간에서 불어오는 듯한 뜨거운 금속 맛이 났다.


둥근 벽에는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마우라는 화랑을 조심스럽게 돌며 차례대로 그림을 살펴보았다. 투박한 추상화부터 캔버스에 진짜 얼굴을 가두기라도 한 듯한 사실적인 표현까지, 구성이나 양식이 비슷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우라는 그중 일부가 몇 세기 전에 활동했던 대가들의 양식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현관에 걸린 그림 속 젊은 남자는 아주 다양한 나이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한 그림에는 중년에 들어선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여전히 강건하고 활기 넘치지만 눈에서 씁쓸함이 엿보였다. 또 다른 그림은 대상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린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주 늙고 피폐한 남자의 초상화였다. 또 다른 그림에는 거대한 상아색 석상 앞에 대전투 후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전부 당신일 수가 있죠?" 마우라가 물었다.


붉은빛의 장막을 타고 대답이 들려왔다.


"난 그대와 다르다. 주군의 피에 흐르던 능력이 날 영원히 바꾸어 놓았지. 내 말을 이해한 줄 알았는데?"


"이해했어요. 아니, 이해한 것 같아요."


"네 주변에 있는 그림들은 내 수많은 삶의 순간들이다.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위대한 순간을 장인들이 그려냈지. 처음에는 내 모든 행위를 기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난 오만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요?" 그가 말을 잇지 않자 마우라가 물었다.


"이제 난 세상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 속에서 내 삶이 새롭게 부활하는 순간만을 화폭에 새기고 있다. 계단을 올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인해 봐."


마우라는 자신이 화랑을 한 바퀴 돌아 계단 앞에 도착한 것을 깨달았다. 마치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우라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 같았다. 오늘 밤뿐만 아니라 마우라가 크렉소르에 있는 어머니의 농장에서 처음 붓을 들고 동물을 그렸던 때부터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말이다.


"왜 저였나요?" 마우라가 물었다. "왜 저를 부르신 거죠? 녹서스에는 저보다 나은 예술가도 많잖아요."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마우라의 주변을 울렸다.


"참으로 겸손하군. 그래, 그대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이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 질투심이 많은 타흐보는 그대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원근감을 타고났다. 세리스는 색을 사용하는 방식이 뛰어나고, 절제심이 강한 주르카는 섬세한 눈으로 작품에 끝없는 매력을 더하지. 취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콘라드는 예외지만 말이야.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제 친구들을 아시나요?"


"물론. 내가 별 뜻 없이 그대를 선택했을 거라 생각하나?"


"모르겠어요. 어떤 이유로 저를 선택하신 거죠?"


"그런 변화의 순간을 담으려면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는 자가 필요했지. 예술가라는 이름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자가 말이야. 그래서 이곳에 있는 거다, 마우라 베체니아. 그대의 모든 붓놀림에 생각이 담겨 있고 화폭에 남기는 모든 흔적, 쓰는 색 하나하나마다 의미가 있어. 그림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이 표현하는 생명의 힘을 담아내기 위해 기꺼이 영혼을 바쳐 헌신하지."


마우라는 전에도 후원자들이 치켜세우는 말과 동료 화가들의 말뿐인 칭찬을 들어 봤지만, 블라디미르의 말은 전적으로 진심이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긴 블라디미르의 말에 마우라의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왜 지금이죠? 이 순간의 무엇이 그렇게 특별하길래 초상화를 그리시려는 건가요? 아까 그러셨죠? 세상사의 전환점에서만 그림을 그리신다고…"


블라디미르가 말하자 그의 목소리가 마우라의 주변을 휘감는 듯했다.


"그런 순간이 다가왔으니까. 난 정말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다, 마우라. 철의 망령을 불멸의 요새에서 몰아낼 만큼, 그를 뒤이은 통치자들이 힘을 얻기 위해 형제의 시체를 짓밟고, 나아가 배반자들의 야망으로 몰락하는 것을 수없이 봤을 만큼 오랫동안. 오래되고 부패한 땅에 깊게 뿌리내린 한밤의 꽃처럼 제국의 중심에 도사리는 병폐를 알 만큼 오랫동안 말이야. 그녀와 난 함께 춤을 췄지. 그래, 우리는 수 세기 동안 피의 춤을 췄지만 이제 음악의 박자가 바뀌고 춤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내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어리석은 이들의 행렬, 이 삶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어울리지 않아."


"이해가 안 돼요. 앞으로 뭐가 다가오는 거죠?"


"예전이었다면 그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것을 맞이하기 위해선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뿐이야. 난 너무 오랫동안 소극적이었고 아첨꾼과 간악한 자들이 매번 내 변덕에 비위를 맞추도록 내버려 뒀다. 하지만 이제는 내 것을 차지할 준비가 되었지. 아주 오랫동안 날 부정해 온, 나의 왕국을 말이야. 이것은 불멸이다, 마우라. 나와 그대의."


"불멸…?"


"그렇다. 전사와 예술가는 자신의 위업과 작품을 통해서 영원히 기억되지 않던가? 그들의 대업이 남긴 유산은 필멸자들의 짧은 생을 넘어 이어지지. 데마시아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군사적 신념에 따라 데마시아를 세운 전사들을 기리고 있다. 수천 년 전에 완성된 위대한 극작품은 아직도 상연되고 룬 전쟁 이전에 대리석 덩어리에서 탄생한 조각품은 그것을 발견한 이들에 의해 찬사를 받지."


마우라는 계단을 올라가면 무언가 되돌릴 수 없는, 마지막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얼마나 많은 예술가가 서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시 내려왔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뒤로 돌아 걸어 나갔을까?


마우라는 떠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블라디미르는 마우라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우라가 떠나고자 한다면 무사히 화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해 일생일대의 역작을 그릴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친다면 죽는 날까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마우라."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이번에는 그의 비단결 같은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마우라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 블라디미르가 있었다.


위에서 내리비치는 붉은빛을 등진 그의 모습은 늘씬하고 호리호리했다. 하얀 머리가 그의 뒤에서 물결쳤고, 진홍색 날개를 지닌 나비 떼가 위쪽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때 선명한 푸른색을 띠었던 그의 눈은 이제 붉게 이글거렸다.


그 눈은 마우라의 심장박동에 맞춰 고동쳤다.


블라디미르는 마우라에게 손을 뻗었다. 반짝이는 갈고리처럼 긴 손톱을 지닌 그의 늘씬한 손가락은 끝으로 갈수록 우아하게 가늘어졌다.


"그럼 불멸의 유산을 남기겠나?"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네." 마우라가 말했다. "그럴게요."


마우라는 그의 손을 잡았다. 둘은 함께 진홍빛 장막 속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출처 : 리그 오브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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